[상대방 입장 경청하기] 한국의 역사 교과서. 역사를 도구로 사용하는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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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8-29 13:39본문
6-3. 일본에 대한 침략을 숨기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
몽골 제국은 조선과 항해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려는 원나라를 위해 문영의 역(1274년)에서 900척의 군함을 건조하고, 고려 군인 8,000명과 수군의 선원 6,000명을 참가시켰습니다. 이들은 원나라 군대 15,000명과 함께 총 3만 명의 대군으로 일본을 침략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이키(壱岐)와 쓰시마(対馬) 섬의 주민들을 학살한 후, 하카타(博多)를 공격했습니다.
더욱이, 대규모 침략인 홍안의 역(1281년)에서는 10만 명의 병력과 3,500척의 군함을 가진 강남군(江南軍)과 4만 명의 병력과 900척의 군함을 가진 동로군(東路軍)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으로 일본 침략에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원나라와 함께 고려에 의한 일본 침략이 아니면 무엇을 침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추가로, 교과서의 연표에서 고려에 의한 일본 침략인 1274년(문영 11년)과 1281년(홍안 4년)에 발생한 원나라의 침략 사건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한국이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왜곡하는 행위의 한 예로 보입니다.
이러한 예시들은 한국의 역사 교육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적 사건을 숨기고, 자국의 침략적 행동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7. 독립 운동이 일본의 패전으로 이어졌다고?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의 광복은 연합군의 승리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에 맞서 끊임없이 전개된 독립 운동의 결과로 설명됩니다(166쪽). 그러나 이 서술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반일 저항 운동의 영웅으로 여겨지던 김일성조차도 종전 때까지 소련군의 대위로서 소련 영토 내에서 가족과 함께 평온하게 거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는 2004년 초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다루어졌으며, 당시 러시아 마을 주민들이 김일성이 살았던 집과 그의 어린 아들의 묘지 위치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실제로는 저항 운동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김일성조차 이 정도였으니, 다른 항일 운동의 '영웅들'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은 더욱 의심스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마치 유럽에서 벌어진 저항 운동과 비슷한 규모와 영향력을 가진 운동이 조선 반도와 일본 내에서 전개되었던 것처럼 서술하지만, 이를 실제로 믿는 일본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가 국정 교과서를 통해 가르쳐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를 진실로 믿고 있습니다.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받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교과서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입니다. 일본의 패전 36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일본의 패전과 연결시키는 서술은 터무니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끊임없이 전개된 독립 운동'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리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안중근과 1932년 상하이에서 백선장(白河大将)을 폭탄으로 암살한 윤봉길의 단독 테러밖에 없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테러리즘은 분명히 악으로 간주되는데,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이 안중근의 테러 행위를 교과서에서 칭송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잘못된 역사적 인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안중근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한다면,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테러를 정당화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테러리즘을 부정한다면, 당연히 안중근의 행위도 부정해야 할 것입니다.
8. 손다 외상(外相)의 발언
1970년대에 외무대신을 세 번 맡았던 손다 스나오(園田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81년 8월의 한일 외상회담에서 한국 측이 안전 보장 문제(한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방패 역할을 하며 일본을 지키고 있다는 주장)를 포함시켜, 일본에 대해 5년 동안 60억 달러(당시 2조 1천 6백억 원)의 막대한 정부 차관과 기술 이전을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손다 외상은,
"한국에서는 싫어하는 상대에게서 돈을 빌리거나 기술을 배우는 사회 관습이라도 있는가?"
라고 공식 자리에서 발언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부터 반일 교육과 반일 선전을 활발히 하면서도, 일본에 대해 대량의 자금 지원과 기술 지원을 요구해왔습니다. 손다 외상의 발언은 한국의 비상식적이고 국제 예절을 잃은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외상은 이를 참아내며 아쉬워했지만, 제대로 된 반론을 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상식으로는 항상 악담을 퍼붓는 상대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그런 상식이나 예의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담을 하면서도 평범하게 돈을 빌리러 오거나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돈을 빌리거나 기술을 가르쳐 준 경우에도 상대에게 감사를 표할 줄 모르며, 좋은 일은 모두 자국의 공로로 여기고, 나쁜 일은 모두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거짓이라고 생각된다면, 계속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9. 포항제철소
한국 동해안의 포항(Pohang)에는 한국 산업 개발의 상징적 존재인 POSCO(포항종합제철소)가 있습니다. 현재 이 제철소는 세계에서 5위 안에 들며, 일본의 신일철과 뒤를 잇는 생산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 제철소 건설에 있어 전면적인 자금 지원과 기술 협력을 제공한 나라는 당시 일본이었으며, 일본의 협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사업이었습니다.
포항제철소 건설에 있어 한국은 처음부터 일본을 상대방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독일의 DKG 그룹을 계약 상대자로 선택하고, 독일에서의 제철 기술 이전을 기대하며,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국제 컨설팅 회사의 조사 결과, 한국의 생산성이 낮아 일본과의 제품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서독 정부와 영국 정부로부터 자금 조달과 기술 협력을 거부당했으며, 미국 수출입은행에서도 최종적으로 차관 불가능을 선언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어쩔 수 없이 일본 정부에 자금과 기술 지원을 요청하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 1억 6천만 달러 중 일본이 1억 달러, 즉 62%를 제공함으로써 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1기 공사는 1970년에 시작되어 197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일본의 자금 협력과 기술 지원 없이는 제철소의 공사와 시설이 도저히 완공될 수 없었습니다. 제철 및 제강 부문에 국한되지 않고, 자동차, 가전제품, 섬유, 전자 등 한국에서의 산업의 절반 이상이 일본에서의 기술 이전에 의한 것입니다.
1970년대 후반(1975~1984)에는 매주 금요일 밤, 나리타나 오사카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가 일본의 IT 관계 기술자로 가득 차 있었고, 이들은 한국의 회사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기술을 지도하고 일요일의 최종편으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한국이 1976년에 처음으로 수출한 소형 승용차 포니(Pony)에 장착된 것은 한국산 엔진이 아니라 미쓰비시 자동차 제작의 엔진이었다는 것은 당시 자동차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던 사실입니다. 한국 현대자동차가 제작한 엔진은 곧바로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미쓰비시에서 소형 엔진의 제공과 기술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62년부터 1983년까지 21년 동안 한국이 기술 도입한 건수 중 56.3%가 일본에서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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