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위안부의 증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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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5-09 17:38본문
[해설]
일본인 위안부 야마우치 케이코(게이샤 키쿠마루)가 위안부가 된 것은 1942년(쇼와 17)년으로, 여기서는 왜 위안부가 되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인신매매를 근간으로 한 공창제도에서 벗어나, 죽어도 자신의 영혼은 야스쿠니 신사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지원하여 위안부가 된 일본인 여성들이 다수 있었다. 여기서 소개하는 케이코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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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마루 씨가 트랙 섬(*마셜 제도)으로 건너온 것은 1942년(쇼와 17년) 3월, 만 18세의 봄이었다. 도쿄 니시코야마에서 게이샤로 활동하던 시절, 친구인 이즈루 짱과 둘이서 1인분 50엔짜리 굴튀김을 먹으면서 결심했다.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즈루 짱이었는데 빚을 군이 대신 갚아준다는 말을 듣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결심했다.
열두 살 때부터 데려온 아이로서, 빚에 얽매여 살아온 키쿠마루 씨는 아무리 일해도 줄어들지 않는 빚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춘시절을 빚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묶여 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파마도, 일본머리를 묶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가끔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할 때면 일본머리 때문에 게이샤라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여러 번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4천 엔 가까운 빚이 있었어요(엽서가 2엔이던 시절). 게이샤라는 직업은 돈이 많이 들어요. 기모노 한 벌을 사는 데도 빚을 내야하고, 춤과 샤미센(*日 현악기)도 배워야 하잖아요. 룸에 나갈 때는 시마다(島田)를 묶어야 해요. 그 때는 살짝 붙이거나 원결, 키다리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머리를 묶을 때마다 1엔 가까이 들어갔어요. 그래서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가끔은 싫은 손님과 베개를 같이 써야 할 때도 있다. 남양의 섬에서 2년만 열심히 일하면 그런 생활에서 해방되고, 돈도 좀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보통의 딸들처럼 같은 또래의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자 .......
젊었던 두 사람은 그런 달콤한 꿈을 꾸고 <트랙 섬>으로 건너갔다. 아직 생존해 있던 아버지의 반대는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는 가야 할 일이니 가게 해 주세요"라는 어디선가 들은 대의를 내세워 납득시켰다. '위안부'라는 직업이 어떤 직업인지 잘 알지 못했다. 어차피 게이샤의 연장선상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트랙 섬에 도착할 때까지의 그 쓸쓸한 기분은 잊을 수 없었어요. 요코하마 항을 떠나 고베에 들렀다가 조선의 부산. 부산에서는 조선 여성들이 많이 승선했어요. 그녀들은 우리와 달리 지원이 아닌 듯 저고리를 입고 '아이고, 아이고'하고 우는 모습이 정말 안타까웠어요. 나도 덩달아 울고 말았어요. ......"
【출처: 히로타 가즈코(広田和子) 『증언록 종군위안부・간호사-전장에 살았던 여자의 통곡』(신인물 왕래사 1975년 11월 15일) 18-19쪽】
* by STAY GREEN~GREEN 블로그 (교토 근대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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