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박유하의 식민지배 보상 요구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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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3-12-12 00:08본문
*출처: 프리덤뉴스 웹진 1호
[칼럼] 『제국의 위안부』 매춘부 표현 무죄는 당연하나 식민지배 보상 요구는 국제법 위반
최덕효 한일갈등타파연대 대표
『제국의 위안부』(2013)를 통해 구 일본군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2심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대법은 "학문적 주장이나 의견 표명으로 평가함이 타당하다"며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판단했다.
대법의 무죄 판단은 현재 진행 중인 일제하 '과거사' 사건 판단에 중요한 법적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관련 사건으로는 2019년 수업시간에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 등 언급한 혐의로 기소된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와, 최근 강의 중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간 게 아니라 모집에 응한 매춘이라고 발언해 고발된 최정식 경희대 교수 등이 있다.
대법은 이번 판단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양국 간 갈등을 키우는 것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주제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일 외교 갈등을 유발한 '과거사' 이슈로는 징용 문제가 첨예하며, 관련하여 민노총 등이 설치한 강제징용노동자상(징용상) 사건이 있다.
2018년 징용상 작가인 김운성·김서경 부부는 이 동상 모델이 ‘일본인 이미지’(1926.9.9. 아사히카와 신문에 실린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일본경찰에 구출된 일본인 노동자 사진)와 유사하다고 지적한 김소연 변호사, 이우연 연구자,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를 명예훼손으로 민형사 고소했으나 검찰에서는 모두 무혐의 종결됐다. 민사는 앞의 2인은 최근 대법에서 무죄 판단했고 뒤 2인은 2심 계류 중이다.
‘일본군위안부’ 제도는 기본적으로 일제 공창제 하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상업 매춘을 전쟁터에 옮겨놓은 것이었다. ‘강제징용’은 일제가 1939년에 제정한 국민총동원령을 1944년 9월부터 한반도에 적용했으며, 그 전에는 ‘모집’ 및 ‘관알선’을 통한 경제활동의 성격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두 가지 사안 모두를 시기와 무관하게 ‘강제동원’ 혹은 ‘강제연행’으로 일반화 관념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박유하를 고소한 주체는 나눔의집 쪽에서부터 이른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을 총망라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의 실상은 복마전 그 자체였다.
법원은 횡령과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안신권 전 나눔의집 소장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집에 벌금 1000만원을 판결했다. 그리고 나눔의집 출신 공익제보자들에 의하면 나눔의집은 그간 모은 후원금 130억원으로 설립취지와 어긋난 영리사업인 고급 민간 요양시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검찰은 정의기억연대(정의연, 구 정대협) 후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 정대협 대표 윤미향 의원에 대해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또한 감사원은 유엔 고위직을 역임한 전 정대협 상임대표 신혜수가 인건비를 불법 수령한 사실도 밝혀냈다.
‘과거사’를 빌미로 한 이들의 불온한 행태는 단지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윤미향과 이나영(정의연 대표)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주최한 간토 대학살 100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데에서 보듯 북한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과 민노총 등의 정체성은 ‘일본군위안부’와 ‘강제동원’이라는 이슈가 반정부·반국가 활동을 위해 종북세력들이 반일선동 수단으로 벌이는 위안부 동상과 징용공 동상이라는 정치적 조형물 설치와도 직결돼 있는 것이다.
그 기원의 한 사람은 요시다 세이지로 1942년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일했고 1947년 공산당(일본)후보로 시모노세키 선거구에 입후보했다 낙선한 인물이다. 그는 1983년에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에서 자신이 제주도에서 위안부 여성을 징집했다고 증언해 ‘위안부’ 이슈몰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증언은 이를 보도한 아사히신문의 2014년 제주도 현지 조사 결과 허구로 밝혀졌으나 1992년 대한민국 정부 위안부 실태 조사 증거자료 및 1996년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증거자료로 여전히 남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7살 때 부모와 함께 도일한 재일교포 박경식(朴慶植)이다. 그는 조총련이 운영하는 일본의 ‘조선대학교’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기 위해 같은 해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을 출간했다. 이는 책 제목에서 보듯 일제하 약 8년간 전시기(아시아-태평양전쟁) 동안 노무동원의 형태인 ‘모집’, ‘관알선’, ‘징용’을 “강제연행”으로 개념화한 다음 이를 식민지 시기 전체로 확대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요시다 세이지와 박경식의 반일·종북적 의도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제의 공창제 아래 위안부나, 모집 등에 응한 노무자들 모두가 강제동원(강제징용, 강제연행)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연합국에 맞서 싸운 조선인 출신 일본군·군무원까지 추가되어 전국 도처의 과거사 관련 역사관에 이들 모두가 ‘피해자’로 전시되고 보상되는데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가 ‘매춘’을 표현한 것은 역사적 팩트로서 대법의 무죄 판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의 위안부’에 실린 내용이 모두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258쪽) “일본 정부에 기대한다 – 새로운 조치에 나서야 할 세 가지 이유”에서 1965년 한일협정의 한계에 대해 “일본 정부는 막대한 배상을 했지만 조약에서 ‘식민 지배’나 ‘사죄’나 ‘보상’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박유하가 프레시안 인터뷰(2014.6.30)에서 일본 책임에 대해 "위안부 '강제 연행'이 아니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한다면서 법적 책임으로 “일본 국회를 통해 법을 만들어서 보상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조선일보 기고문(2023.10.30.)에서 "내가 ‘제국의 위안부’ 쓴 건, 그분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점에서도 재확인된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박유하의 소신이 ‘미군위안부(양공주)’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란 전시뿐 아니라 전쟁대기 상태(주둔)에서도 존재하는 문제다. 현재의 동아시아에 주둔 중인 미군 역시 병사를 ‘위안’하는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고, 언젠가는 이 문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 그 때는 물론 미국도 비판받아야만 한다.(『제국의 위안부』(271쪽)”고 고발하고 있다.
지난해 대법원은 미군 기지촌 ‘위안부’ 제도에 대한 한국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원고 측의 손을 들어 준 기이한 판결을 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원고 측은 더 나아가 미국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하니 박유하 또한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국교를 정상화했으며 조약에 포함된 한일청구권협정은 양국간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상한 위안부 이슈에 대해 일본 정부는 관련된 식민지 및 피침략국 11개국을 상대로 아시아여성기금과 한일위안부합의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징용 문제에 대해 최근 한국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추가 해법을 도모했다.
그럼에도 박유하는 종북세력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일제강점기 법적 배상과 유사한 맥락의 식민지배 보상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한일기본조약을 무위로 돌리자는 해석이 가능하며 결과적으로 국제법 위반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엄중한 정세 속에서 지난 시기 모호한 일본군‘위안부’ 이슈에서 더 나아가 미군‘위안부’라는 동맹군의 성 문제까지 소환하려는 박유하식 발상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인류사적으로 존재해 온 매춘 문제는 통상 빈곤에 기인한 사회적·생물학적 현상으로, 극단의 민족주의적 · 도덕적 · 성 금지주의 관점에 갇히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파괴를 노리는 종북세력들의 교묘한 ‘성정치’ 전술에 대한 깊은 주의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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