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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국/인도-버마 전구 미군에 배속된 심리전 팀/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제49호: 조선인 ‘위안부’ 20명 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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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2-08-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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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국(OWI)이 미치나(버마)에서 포획한 조선인 ‘위안부’ 20명을 심문하고 작성한 보고서. 심문자는 일본계 2세 미군인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임. ‘위안부’의 동원부터 시작하여 생활 환경, 위안소 운영 체계 등에 대한 아주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 ‘위안부’를 심문 대상으로 한 보고서 중에서는 가장 자세한 자료임.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SEATIC) 심문회보 제2호는 위안부들이 있었던 위안소의 업자인 기타무라(Kitamura)를 추가적으로 심문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 두 보고서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검토해야 함.

심리전 작전반 일본인포로 심문보고(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49호(1944.8.20~ 9.10)

 



「심리전 작전반 일본인포로 심문보고」 49호
1944년 8월 20일~9월 10일
미국전쟁정보국 심리전팀

인도-버마 전선의 미군 부속 APO G89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장소 : 레도 포로수용소(Ledo Stockade)
심문보고 No.49     심문일 :  1944년 8월 20일~9월 10일
            보고일 :  1944년 10월 1일
            작성자 :  T/3 알렉스 요리치(Alex Yorichi)

포로들 :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체포일 :      1944년 8월 10일
수용소 도착 일자 :  1944년 8월 15일

머리말
이 보고서는 미얀마에서 미트키나(Myitkyinn, 밋치나) 함락 이후 소탕작전이 진행되던 1944년 8월 10일경에 잡힌 두 명의 일본인 민간인과 20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심문해서 얻은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보고서는 어떻게 일본이 조선인 위안부를 충원했는지, 위안부들이 어떤 상황에서 생활하고 일했는지, 이들이 일본인 병사들과 가지고 있었던 관계와 반응은 무엇인지 그리고 군사 상황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위안부’는 병사의 편의를 위해 일본 군대에 소속된 매춘부 혹은 ‘직업적인 군대 종사자들’(professional camp followers)이다. ‘위안부’는 특이한 일본적인 단어다. 다른 보고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위안부’는 일본군이 싸우기 위해 가는 곳에는 어디에서건 발견된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일본이 모집하고 미얀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에 소속된 조선인 ‘위안부’만을 다룬다. 일본은 1942년에 이러한 여성 703명 정도를 배에 실어 미얀마로 보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모집
1942년 5월경에 일본인 업자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이 정복한 새로운 영토에 ‘위안서비스’를 제공할 조선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조선에 도착했다. “이 서비스”의 본질은 밝히지 않았으나, 병원에 있는 부상자를 찾아가 붕대를 묶어주고 일반적으로 병사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이들 관리들은 돈을 많이 버는 기회이며 가족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이고 일은 쉽고 새로운 땅인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등으로 유인했다. 이러한 거짓 약속에 속아 많은 여성들이 해외 근무에 응했으며 몇 백 엔이 선금으로 주어졌다. 이런 여성들의 대다수는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으며 소수는 이전부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이 서명한 계약서로 인해 이들은 군대 규정을 적용받았으며 이들이 미리 지급한 가족의 빚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의 기간 동안 ‘가정부’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약 800명의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모집되었으며 이들은 일본인 ‘집주인’과 함께 1942년 8월 20일경에 미얀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들은 8~22명에 이르는 짝을 지어 왔다. 여기에서 이들은 미얀마의 각지로, 통상 일본 군대 캠프 근처에 있는 원만한 크기의 도심지로 분산되었다. 마지막에는 이들 집단 중 4개가 미트키나 근교에 자리를 잡았다. 그 근교는 쿄에이(Kyoei), 킨수이(Kinsui), 바쿠신로(Bakushinro), 그리고 모모야(Momoya)였다. 쿄에이 집은 “마루야마 클럽”이라고 불렸으나, 이 여성들이 미트키나에 도착했을 때는 미트키나 주둔군 사령관인 마루야마 대령이 자신의 이름을 떠올린다고 반대했기 때문에 간판을 바꾸었다.

성격
심문을 통해 보건대 조선인 ‘위안부’는 평균적으로 약 25살이고, 무지하고, 유치하며,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다. 이들은 일본인의 기준이나 백인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예쁘지 않다. 이들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으며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낯선 이 앞에서는 조용하고 얌전을 피우지만, “여성의 엉큼한 간계를 알고 있다.” 자신들의 ‘직업’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에 대한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전쟁포로로서 미트키나와 레도(Ledo)에서 미국인 병사에게 받은 친절한 대우 때문에 미국인 병사들이 일본인 병사보다 더욱 정이 있다고 느낀다. 그녀들은 중국인 군대와 인도인 군대를 두려워한다.

생활과 작업 상황
미트키나에서 이 여성들은 통상 커다란 2층집(일반적으로 학교 건물)에서 살며 각각 따로 독립된 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자고, 그리고 영업을 했다. 미트키나에서 이들은 일본 군대로부터 어떠한 정기적인 음식 배급도 받지 않았던 까닭에 집주인들이 음식을 준비했다. 이들은 미얀마의 다른 이들과 비교한다면 거의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다. 이는 미얀마에서 두 번째 해를 보내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물건은 엄격한 배급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잘 살았으며,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고국에서 온 ‘위문품’을 받은 병사들이 이들에게 준 많은 선물에 더해서 옷, 신발, 담배, 그리고 화장품을 살 수 있었다.
미얀마에 있었을 때 이들은 장교와 사병들과 함께 스포츠 행사에 참가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며, 소풍, 오락, 그리고 사교 식사에도 참여했다. 이들은 축음기도 가지고 있었으며 시내에서는 쇼핑도 할 수 있었다.

가격 체제
이들이 영업을 하는 조건은 군대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혼잡한 지역에서 규정은 매우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군대는 혼잡한 지역에서는 가격, 우선권, 그리고 특정 지역에서 작전을 하는 여러 부대를 위한 시간표 등의 체계를 갖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심문에 근거하여 평균적인 체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병사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 1.50엔 20분에서 30분
 2. NCOs 오후 5시부터 오후 9시까지 3.00엔 30분에서 40분
 3. 장교 오후 9시에서 자정까지 5.00엔 30분에서 40분

이는 중앙 미얀마에서의 평균 가격이었다. 장교들은 20엔을 지불하면 밤을 새울 수 있었다. 미트키나에서 마루야마 대령은 이 평균 가격을 거의 절반으로 낮추었다.

스케줄
병사들은 위안소가 너무 북적거린다는 불평을 자주 했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접대를 받지 못했으며 군대가 체류시간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빨리 나와야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군은 특정한 부대를 위해 특정한 날을 할당했다. 그날에는 부대에서 나온 통상 두 명의 병사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위안소 앞에 있었다. 헌병 한 명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현장에 나와 있었다. 아래는 제18사단이 매이묘(Maymyo)에서 주둔할 당시 이 사단의 여러 부대가 ‘쿄에이’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는 스케줄이다.
 일요일 --- 제18사단 본부 직원
 월요일 --- 기갑부대
 화요일 --- 기술자
 수요일 --- 휴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신체검사
 목요일 --- 군의관
 금요일 --- 산악포병
 토요일 --- 수송단
장교는 일주일에 7일 밤을 올 수 있었다. 위안부들은 이러한 스케줄로도 너무나 혼잡해서 모든 손님을 다 받을 수 없었으며 이는 많은 병사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불평했다.
병사는 위안소에 와서 가격을 지불하고 왼쪽에는 가격이, 다른 쪽에는 위안소의 이름이 적힌 약 2인치 정도 되는 마분지 티켓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병사들의 신원이나 직위는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가 되는 동안” 확인되었다. 위안부는 손님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는 너무 취한 사람을 거절하는 경우에 가끔 이용되었다.

월급과 생활환경
‘집주인’은 각 여성이 계약서에 서명할 당시 진 빚이 얼마냐에 따라 이 여성의 총수입의 50~60%를 받았다. 이는 평균 한 여성의 총 수입이 1,500엔 정도 되었으며 절반인 750엔이 ‘집주인’에게 넘겨졌음을 의미한다. 많은 ‘집주인’들은 이 여성들에게 음식과 다른 물품에 높은 가격을 매겨 넘겼으므로 이 여성들의 삶은 아주 어려울 수도 있었다.
1943년 후반에 군은 빚을 갚은 일정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어떤 여성들은 조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심문은 또한 이들 여성들의 건강 상태가 양호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피임약과 도구를 공급받았으며 가끔 병사들은 군이 나누어 준 자신의 피임도구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들은 위생문제에 관한 한 자신들과 손님 모두를 보살피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일본인 군의관이 일주일에 한 번씩 위안소를 방문했으며, 병이 걸린 여성들을 치료하고, 격리시키고, 병원으로 보냈다. 이와 같은 절차가 군대 내에서도 실시되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병사가 성병으로 격리되어 있는 기간에도 월급을 못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군인에 대한 반응
이들에게 일본인 장교나 사병과의 관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름이 두 개 정도 언급되었다. 이는 미트키나 주둔군 사령관인 마루야마 대령과 지원병을 지휘해 온 미즈카미 장군(Maj. Gen. Mizukami)이었다. 전자는 고압적이고, 이기적이며, 냉정해서 부하들을 위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후자는 선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군인으로 그 밑에서 일하는 이들을 최대로 생각해 주었다. 대령이 위안소에서 살다시피 했다면 장군은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미트키나의 함락과 함께 마루야마 대령은 탈주했다고 전해지지만 미즈카미 장군은 그의 부하들을 피난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병사들의 반응
“위안소가 만원이어서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들은 쉬이 부끄러워했다”고 말한 한 위안부에 따르면 평균적인 일본인 병사들은 위안소에 있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제안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결혼을 하기도 했다.
위안부를 보러 온 가장 최악의 장교와 사병은 술에 만취되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떠나는 이들이었다. 모든 여성들은 입을 모아 사실이라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취했어도 일본인 병사들은 군대에 관련된 일이나 기밀을 말하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들이 약간의 군대에 관련된 일에 대해 말머리를 꺼낼 수 있었지만 장교나 사병 모두 응답이 없었으며 오히려 “여자가 알 일이 아닌 이야기를 꺼낸다고 우리를 꾸짖었다”고 한다. 마루야마 대령조차도 취중에도 이러한 일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병사들은 고국에서 온 잡지, 편지 그리고 신문을 받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자주 표현했다. 이들은 또한 잡지, 비누, 수건, 칫솔, 작은 인형, 립스틱, 그리고 나막신 등으로 가득한 ‘위문품 상자’를 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립스틱과 나막신은 분명 여성용이어서 위안부들은 고국에서 이러한 물건을 보내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군사 상황에 대한 반응
위안부들은 그들의 후퇴와 체포의 시점을 포함하여 지금까지도 미트키나 주변에서 전개되는 군사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가 약간 있다.
“미트키나와 활주로에 대한 초기 공격으로 약 200명의 일본인이 전투에서 죽었으며 약 200명이 도심을 방어하도록 남겨졌다. 탄약은 아주 적었다.”
“마루야마 대령은 부하들을 분산 배치시켰다. 다음 며칠 동안 적은 무차별 사격을 해댔다. 어떤 특정한 목표물이 없었던 관계로 이들의 공격은 소모적이었다. 다른 한편 일본인 병사들은 한 번에 한방을 쏘도록, 그것도 명중시킬 확신이 있는 경우에 한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적이 활주로의 서쪽을 공격하기 전에 미트키나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은 북부와 서부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다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약 400명의 군사가 남겨졌는데 대다수는 114연대 소속원이었다. 마루야마 대령은 도심이 공격 대상이 되리라고 예상치 못했음이 분명하다. 나중에 미즈카미 장군의 제56사단이 2개 연대 이상 되는 증원군을 데리고 왔으나 도심을 지킬 수 없었다.
여성들은 연합군의 폭격이 강렬하고 섬뜩해 마지막 며칠 동안 간이호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1~2명은 심지어 거기에서조차 일을 했다고 한다. 위안소는 폭격을 맞았으며 위안부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후퇴와 체포
‘위안부’들의 후퇴와 급기야 붙잡히게 된 이야기는 다소 모호하고, 생각은 혼란스러웠다. 여러 보고서에서 보건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던 것 같다. 7월 31일 밤, 3개 위안소(라쿠신로는 킨수이와 합해졌다)의 ‘위안부들’, 가족,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던 이들 63명은 조그만 배를 타고 에워와디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국에 와잉마우(Waingmaw) 근처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8월 4일까지 머물러 있었으나 와잉마우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이들은 한 병사 집단을 따라 길을 나섰으며 8월 7일 적과 사소한 교전이 있었고 일행은 흩어졌다. 이 여성들은 3시간 간격으로 병사들을 따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명령을 지켰지만 강가에는 병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강을 건널 방법도 없었다. 이들은 근처에 있던 집에 머물렀다. 8월 10일 한 영국인 장교가 이끄는 카친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은 미트키나로 인도되었으며 그리고 나서는 나도 레도 스톡케이드에 데리고 와 심문을 하고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선전
(※한 문장 전체를 알아볼 수 없음)
한 여성은 마루야마 대령에 관한 (이는 분명 마루야마군대의 호소였을 것이다) 리플릿을 기억하고 있지만 믿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은 병사들이 때때로 리플릿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것은 한 장교가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요청
(※한 문장 전체를 알아볼 수 없음)
여성들은 ‘위안부’들의 체포를 이야기하는 리플릿이 이들의 체포를 군대가 알아 다른 여성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조선에 투하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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