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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광부의 경험 세계 (천옥돌, 임태호)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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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2-02-06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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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광부의 경험 세계
1) 천옥돌의 경우
1916년 7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천옥돌은 열여덟 살인 1934년 10월 고향에서 결혼했다. 남편의 나이는 서른셋이었는데, 젊었을 때부터 규슈 탄광을 비롯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일을 하던 일반도일자였다.
결혼을 위해 일시귀국을 한 남편이 결혼한 이듬해 혼자 일본으로 가버리자 천옥돌은 1936년 6월 생후 5개월 된 아들을 업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사도섬으로 왔다.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몰랐기에 물을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었고,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는 고생을 하며 간신히 도착했다.
남편은 시누이 부부와 함께 사도섬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얼음과자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설탕을 물에 녹여 눈을 조금 섞고 소금을 넣어 병에 얼린 것이었다. 천옥돌은 아이를 업고 손수레에 얼음과자 100개를 싣고 하루 종일 행상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조선에서 사는 것 보다 경제적으로 나았으므로 1939년에 고향에 있는 여동생과 남동생을 불러들였고, 2년 후에는 어머니와 친척도 불렀다. 비록 전쟁시절이었지만 가족 친지가 모여 살았다.
“전쟁 중에 육지에는 먹을 것이 없었지만 사도에서는 열심히만 일하면 먹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
패색이 짙어지자 B-29가 사도 하늘까지 날아와 섬사람들은 겁에 질리기도 했으나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천옥돌은 1936년 사도섬에 들어간 이후 2년간 고향에서 산 것을 제외하면, 한 발자국도 섬을 나간 적이 없었다. 해방 후에는 조선 엿을 팔거나 고무신 수리, 폐품 수집 등을 하며 여덟 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살았다. 그녀에게 사도는 “일이 없어도 살기가 좋은” “마음이 편한 곳”이다.
이같이 천옥돌이 평생 사도섬을 고향 이상으로 여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강제동원과 무관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임태호의 경우
"임태호는 (1940년)‘자유 모집’으로 알고 갔는데, 현지에서 ‘징용’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으나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징용은 1944.9 이후 약 8개월간)

1919년 12월 20일 충남 논산군에서 태어나 1940년 11월 사도에 동원되었던 임태호가 주인공이다. 1997년 9월 사망할 때까지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川崎市)에 살았던 임태호는 1997년 5월 사망하기 직전에 길지 않은 구술을 남겼다. 이 구술은 현재 유일한 사도광산 생존자의 구술 기록이다.
임태호는 1940년 11월 ‘모집’이라는 형태로 젊은 동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 땅을 밟았다.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좁은 배에는 조선인으로 넘쳐났다. 니가타현 사도섬에 도착하니 산속 오지의 산 정상에 함바(飯場. 노동자숙소)가 있었다. 아이카와(相川)라는 곳이었다.
갈 때는 ‘모집’이라고 해서 ‘자유 모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해서 ‘징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쓰비시 사도광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함바에서 일하는 곳까지는 걸어서 1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르내리는데 고생스러운 거친 길이었다. 더운 여름날에도 고생스러웠지만 추운 겨울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으므로 일하는 곳에 도착하면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 일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임태호가 하는 일은 지하에서 광석 채굴이었다. 지하에서 하는 작업은 죽음을 맞닥트리는 일이었으므로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 매일 같이 낙반 사고가 있어서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를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졸이고 살았다. 사망자에게 인간 대접이라는 것은 없었고, 아무런 조의(弔儀)도 없었다.
임태호는 운이 좋았는지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도 지하에서 작업 중에 하시고(발판)가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지하에서 밖으로 실려 나갈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든 곳은 병원이 아니라 함바의 이부자리였다. 허리를 강하게 맞아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열흘 정도 누운 채 지냈다. 간신히 일어날 수 있게 되자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병에 걸려도 이틀 이상은 쉴 수 없는데, 열흘이나 일하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작업 중에 두 번째 부상을 입어 다시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이대로는 살아서 고향 땅을 밟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과 같이 지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태호는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히로시마(広嶋)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이곳저곳을 다니며 일을 구하다가 가와사키에 정착해서 조국의 해방소식을 듣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임태호에게 조국의 해방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경험으로부터 해방이기도 했다. 그는
“전후 반세기 이상이 지났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정부로부터 진심 어린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은 동료들도 지금은 모두 성불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와 같은 경우에 있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 성의 있는 진정한 사죄를 받기를 원한다”
는 말로 구술을 마쳤다.
임태호는 ‘자유 모집’으로 알고 갔는데, 현지에서 ‘징용’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으나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임태호가 동원된 1940년 11월에 입산한 조선인 광부들은 모두 ‘할당모집’이라는 경로로 동원되었다. 임태호의 구술은 ‘자유로운 상태의 노동자’로 알고 갔으나 ‘강제적 상태의 노무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법적인 경로는 할당모집이었으나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강제동원은 ‘징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광산은 직할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태호는 두 번이나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 여러 차례 부상은 임태호에게 탈출의 계기가 되었다. 임태호가 사도광산을 탈출한 시기는 밝히지 않았다.
사도광산은 섬이라는 구조로 인해 탈출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뒤에서 상세히 기술했으나, 조선인의 탈출은 현지 어부나 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조선인 연초배급명부에 의하면, 주로 탈출은 일시귀선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태호는 일시귀선과정과 다른 방법으로 탈출했다. 현지민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태호가 사도광산을 빠져 나와 정착한 가와사키시는 임태호 외에도 여러 명의 사도광산 경험자들이 정착한 곳이었다. 야마구치탄전의 조선인들도 가와사키시에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가와사카시에 있던 니혼(日本)강관(주)에서 다양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_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미쓰비시 광업(주)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 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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