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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타파연대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김복동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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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11-0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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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아시아연대회의 

김복동(가명 김복자)의 증언 (한국어)

1992.8.10.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본군성노예문제를 기억하고연대하기위한

전쟁과여성인권아카이브

 

우리 집은 딸만 여섯이었습니다 어릴 때 집안 형편은 괜찮았습니다 김경달이라고 하면 양산 남부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양산에 우리 논이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남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어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다 날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깊은 병에 들었습니다. 빚쟁이들은 병중에 계신 아버지를 돈 안 갚는다고 경찰서에 잡아넣는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래서 엄마와 할머니가 겁이 나서 아버지 몰래 돈 준다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모두 뺏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은 우리 식구가 먹을 만큼은 있었습니다. 농사짓고 딸들 시집보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자가 없었지만 그런데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언니들은 나이가 많으니까 시집 안보내면 끌려간다 해서 시집가고 나는 넷째였는데 16살이니 안 잡혀가겠지 싶었습니다. 어린 처녀라 생각되어 들에 소먹이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고 1941년이었습니다.

 

통반장이라 하면 요새 도지사 빽보다 더 컸습니다. 안들이면 그 때는 못사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통반장이 일본 사람과 같이 와서 나를 데신따이에 보내야 하니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본인은 계급장 없는 누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계 일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말을 잘했습니다.

 

그냥 끌고 가는 게 아니고 엄마보고 어떤 서류에다 도장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쓰였는지도 모르고 어머니는 글을 모르니 도장을 찍었습니다. 통반장은 어머니께 내가 공장에 가서 3년만 일하면 돌아올 수 있고, 돈을 더 벌기 원하면 더 일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고향을 떠나 양산에서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는 한 20명 정도의 내 또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20명의 여자들도 다 공장에 가기 위해 왔다고 했고 나처럼 도장찍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의 큰 창고 같은 곳에 합판을 기다랗게 자리를 깔아 놓고는 그 곳에 우리를 있으라 했습니다.

 

거기에서 며칠 있다가 시모노세키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한 일주일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일주일 후 대만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는 두서너 달 정도 있었습니다. 대만에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무엇인가 명령을 기다리는 듯싶었습니다. 대만 사람들이 사는 집이었는데 일본 경찰이라는 사람들이 왔다갔다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그래도 밖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대만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간다고 했으니 나는 단지 아직 우리가 갈 공장이 정해지지 않아서 이렇게 오래 머무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만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3-4개월을 보낸 뒤 관도로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자마자 군의관이 신체검사를 했습니다. 생전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보지 않았는데 옷을 벗고 그것도 다리를 군의관 앞에서 벌리고 다이 위에 누우라 하니 떨리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지금 아이들 같으면 16세 정도 되면 알 것은 다 알겠지만 당시는 16세면 아무 것도 모르는 처녀였습니다. 남자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검사 안하려고 발버둥을 치니 안하면 안 된다면서 강제적으로 옷을 벗기다시피 하여 검사를 받게 했습니다. 검사를 한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검사가 끝난 뒤 잠시 쉬었다가 우리는 위안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위안소는 15층의 높은 빌딩이었는데 빈 건물이었습니다. 1층에는 군인들이 묵고 2층부터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5층에 올라가면 사람이 사는 것처럼 깨끗이 치워져 있어서 사람이 사는가 싶기도 생각되었습니다. 관도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갔다 하면 관동군에 의해 어떻게 끌려가는지도 모르게 잡혀가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가려 하면 군인들이 총을 메고 호위를 해서 나가야 했습니다. 목욕탕은 군인들이 위안소 내에 샤워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둘째 날부터 이제는 본격적으로 위안부 일을 강요했습니다. 처음에 들어온 군인이 바로 그 때 그 군의관이었습니다. 나는 반항했습니다. 너무나 무서워서 뒤꼍으로 도망을 쳐 덤불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덤불 속에서 나는 잠이 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야단이 났습니다. 없어졌으니 도망갔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나는 눈을 떠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군의관이 나이 양 볼때기를 엄청난 힘으로 때렸습니다. 한참을 맞고 나니 얼굴 전체가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안들을 수 없었습니다. 반항해 봤자 나만 손해다 싶어 시키는 대로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래 부분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퉁퉁 붓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다른 처녀 2명과 함께 죽으려고 배갈을 큰 것을 한 병 사서 위안소 층 베란다에 가서 그것을 다 마셔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기절해 버렸습니다. 군인들이 야단이었나 봅니다. 밤이 되어도 위안부 3명이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빨래를 해서 빨래줄에 널고 있는데 밑에 베란다에 여자들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신고를 해서 병원으로 옮긴 모양이었습니다.

 

하여튼 내가 눈을 뜨니 병원에서 닝겔주사를 맞고 있었습니다. 위안소에서의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도 진저리나고 서글픕니다. 죽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려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에는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한군데 모아 놓지 않고 군데군데 떨어뜨려 놓

았습니다. 위안소는 위치해 있었습니다. 군대밖에 사병들은 아침 8시가 되면 나와서 저녁 5시가 되면 들어갑니다. 저녁 7시가 되면 장교들이 나옵니다. 평일은 보통 15명 정도 상대해야 되었고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50명 정도는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들어오면서 작은 표조각과 콘돔을 들고 왔습니다. 물론 그 관리자는 일본인이었습니다. 돈을 받아야 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단지 밥 먹여주고 어떨 때 내가 옷이 필요하다 하면 옷을 사주고 화장품이 필요하다 하면 화장품을 사다 주었습니다. 돈은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 목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쉬는 시간이면 우리들은 모여 앉아서 울기만 했고 일본이 이겨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일본이 승전하기를 빌기도 했습니다. 식사는 그들이 해주고 우리는 밥 먹는데 가서 먹었고 성병 검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확하게 했습니다. 나는 성병은 한 번도 걸려 본 적은 없지만 상처가 많이 나서 많이 아플 때는 쉬었다가 검사한 뒤 좋아졌다고 하면 또 군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관도에서 그렇게 한 2년동안 있다가 홍콩으로 갔습니다. 한쪽은 홍콩이고 한쪽은 바다였는데 쿠우슈우라고 했습니다. 그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싱가폴로 들어갔습니다. 싱가폴의 위안소는 기다랗게 지어진 집에 칸막이만 쳐진 집이었습니다. 굉장히 더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은 말레이시아로 그 다음 또 자바로 이동해 갔습니다. 두 달 정도 후에 또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옮겼고 두 달 정도 후에 도 어딘지 옮겨가고 그랬습니다. 침략해 들어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산중에 군인들이 있었는데 때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위하여 산중까지 가야 했습니다. 10여명 정도씩 출장을 갔는데 1주일 동안 있다가 아래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옮겨 다닐 때마다 군인들과 같이 배를 타고 같이 다녔는데 여자들은 맨 밑 칸에 탔습니다. 위안부가 바뀔 대 그 위안소에 이미 있던 사람의 이름이 나와 똑 같으면 내가 이름을 바꿔야 했습니다. 나는 가네무라 후꾸요를 제일 오래 사용했습니다.

 

그 곳에서 위안소는 구락별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이름도 다 달랐는데 내가 있던 곳은 고아 구락부라고 불리었습니다. 홍콩에서부터 중국 여자 한 명과 일본 여자 몇 명이 같이 다녔는데 그 여자들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일본 여자는 상대도 안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방송을 통해 일본이 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야 된다는 방송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본 군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 왜냐하면 우리들끼리 어떻게 돌아가야 할 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인솔자가 우리를 제 16군 병원에 넣었습니다 그 때 병원에 들어간 여자들이 거의 50명 정도였는데 다른 구락에 있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간호하는 강습을 시키고 병원 청소도 하고 주사도 놓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호박을 갖다 놓고 그 것이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주사를 놓아 보라고 했습니다. 환자는 많은데 손이 모자라니까 그런 일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사를 놓을 줄 알고 약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병원에 있을 때 이종사촌 형부가 내 사진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대만에서 관도로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과 잘 있다는 편지를 가족에게 보내라고 해서 보냈는데 마침 이존 사촌 형부가 남양 쪽에 보급대로 징용간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그 곳에 가면 복자를 찾아서 함께 데려 오라면서 사진을 줬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꼭 찾아오라고 해서 한국 여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니면서 나를 찾았었다고 했습니다.

 

형부는 수용소에 먼저 들어가 있은 후였습니다. 형부는 빨리 수용소에 가지고 했습니다. 수용소에 가야 빨리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처음에는 보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형부가 책임지고 데리고 가겠다고 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같이 간다고 나를 따라 나선 20여 명과 수용소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여자가 200명도 넘게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의 식사는 찬밥을 끓여서 밀가루를 섞어서 줬습니다. 미군들은 간섭

안했습니다. 자치적으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여자들 관리는 한국 남자들 몇몇이 책임을 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면회를 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형부를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 주변에는 그 곳 주민들이 먹는 것도 팔곤 했습니다. 옷가지를 가지고 먹을 것으로 바꿔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수용소에 있을 때 우리 주소와 이름을 다 적어 갔습니다.

 

일본 이름은 쓰지도 못하게 했고 아침이면 애국가를 부르게 했고 태극기 뺏지를 달아 줬습니다. 한 번씩 미군들이 검사하려 왔는데 물건이 뭐 있는가 싶어 와서는 가방을 뒤지기도 했습니다. 수용소를 나갈 때 금쪼가리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갖고 있다가 걸리면 나가지 못한다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아예 남은 사람들에게 주고 나왔습니다.

 

수용소에서 거의 1년 정도 있다가 드디어 배를 탔습니다. 배 안에는 거의 3천 명 정도가 있었는데 온갖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한참을 와서 부산 항구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1주일 동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배속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는데 호열자라 해서 전염되면 안 된다고 내려 주지 않았습니다. 부산이 다 내려다보이는데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부가 고기잡이 배 계통에 있었던 사람인지라 그 쪽에 떨어뜨려 그 것이 집에 연락이 되어 이종 사촌 오빠와 언니가 배를 타고 면회를 왔습니다. 김치 고추장 같은 것을 배 안에 넣어 주면 우리는 그 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부산 부두에 내리자마자 창고에 들어가게 하더니 사용하던 돈을 모두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관은 한국인과 미국인이었는데 우리들은 있는 돈을 모두 내놓고 기차표 한 장과 돈 천원을 받았습니다.

 

고향집에 돌아오니 23세였습니다. 언니에와 동생 네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고 없었고 어머니 혼자 양산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떠난 후에 간 사람들도 많았는데 다 속이니까 누가 위안부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아장에 갔다고 만하고 혹은 병원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나도 제 16병원에만 있었다고 했습니다. 시골에 의사도 제대로 없다보니 어린애가 아프면 주사도 놓아주고 약에 대해서도 알고 하니 사람들이 정말 병원에만 있었나 보다고 믿어 줬습니다.

 

실제로 내가 위안부로 간 것을 아는 사람은 우리 엄마하고 큰언니뿐이었습니. 그러다 보니 형제간은 다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자식들을 낳아서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어머니도 처음에는 몰라서 나를 계속 시집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얘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위안부로 있다가 같이 나온 여자 중에는 통에 사는 여자도 있었고 거제에 사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도 모두 유곽으로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몸서리도 안 나냐고 물었더니 배운 게 이것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술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장사 시작한 지 얼마 수 결혼해 실패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지는 5년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자식도 못 낳았으니 자식 하나 없이 지내다가 죽은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나서 계속 다대포에서 술장사를 하다가 지금은 그것이 헐리게 되어 그 보상금으로 현재 아파트에 입주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대로 조용히 나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놔두는 것입니다. 주기(죽기) 전에 보상도 일본 정부에게서 꼭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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