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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 손가락질에 이혼 상소까지…남자들은 뭘 했기에 / 이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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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10-1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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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강도몽유록>의 무대인 강화도 연미정. 병자호란 당시 연미정 남쪽 초막에서 꿈을 꾼 소설 속 청허선사가 강화도 함락 당시 목숨을 잃은 여인 15명의 대화를 엿듣는다. 여인들은 “나라의 수치에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인데 어찌 슬퍼하느냐”고 강화도 수비를 맡은 관리들을 질타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소설 <강도몽유록>의 무대인 강화도 연미정. 병자호란 당시 연미정 남쪽 초막에서 꿈을 꾼 소설 속 청허선사가 강화도 함락 당시 목숨을 잃은 여인 15명의 대화를 엿듣는다. 여인들은 “나라의 수치에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인데 어찌 슬퍼하느냐”고 강화도 수비를 맡은 관리들을 질타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환향녀, 화냥년….’ 왜 다짜고짜 욕지거리로 시작하냐고 하겠네요. 그러나 단순한 욕이 아닙니다.

요즘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MBC 드라마 <연인>을 보면 금방 이해할 겁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간 여주인공(길채)이 온갖 고초를 겪고 고향으로 돌아왔죠. 그러나 남편은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삼고 임신까지 시킨 뒤였습니다. 돌아온 부인과 맞닥뜨린 남편의 말이 기막힙니다. “부인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없었겠죠?” 하고 묻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길채를 보고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몸. 뻔뻔스럽게… 낯도 참 두껍다”고 손가락질합니다.

드라마이다 보니까 좀 과장이 섞이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려 드라마에서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기막힌 사연들이 역사서에 나와 있어요.

■하루에 올라온 정반대의 상소문

1638년(인조 16) 3월 11일자 <인조실록>을 볼까요.

이날 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한 장유(1587~1638)가 상소문을 올립니다.

“제 외아들(장선징·1614~1678)의 처(며느리)가 청나라군에 잡혀갔다가 몸값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아들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런데 같은 날 전 승지 한이겸(1581~?)은 정반대의 호소문을 올립니다.

“제 딸이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있다가 몸값을 주고 귀국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들려 합니다. 원통해서 못 살겠습니다.”

이 무슨 딱한 일입니까. 어떤 이는 ‘환향녀’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진정서를 올리고, 또 다른 이는 사위가 귀국한 자기 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겠다고 고집한다는 호소문을 제출하고….

난감한 처지에 빠진 예조가 이 문제를 공론에 부쳤습니다.

청나라는 인질들을 성문 밖에 모아두고 ‘인간시장’을 열었다. <심양일기>는 “청인들이 남녀 인질들을 모아놓으니 수만명이 됐다. 모자가 상봉하고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1637년 5월 17일)고 전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청나라는 인질들을 성문 밖에 모아두고 ‘인간시장’을 열었다. <심양일기>는 “청인들이 남녀 인질들을 모아놓으니 수만명이 됐다. 모자가 상봉하고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1637년 5월 17일)고 전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임진왜란 때도 내치지 않았습니다’

좌의정 최명길(1586~1647)은 단호한 어조로 ‘환향녀’ 편을 듭니다.

“전쟁 중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날 조정에 공론을 붙였음에도 오로지 최명길의 언급만이 실록에 실려 있는데요.

그만큼 최명길의 주장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는 거죠. 왜냐면 임진왜란 때도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는데, 선조가 “이혼 및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은 적이 있었거든요. 당시 선조는 “적진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경우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여인을 견줄 수는 없다”(<조야첨재>)는 ‘단칼 판결’을 내렸거든요.

최명길은 그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합니다.

“어떤 종친이 적진(왜)에서 돌아온 부인과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불허했습니다. 또 적진으로 끌려간 부인을 두고 다시 장가를 든 관리에게 특명을 내렸습니다. ‘나중에 들어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요. 이 관리는 본처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격하된 첩을 정실부인으로 삼았습니다.”

최명길은 “임진왜란 때 고관대작들이 잡혀갔다가 돌아온 처와 그대로 살면서 자식·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다”고 매조지합니다.

심지어 소현세자빈(강빈)은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세자빈은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심지어 소현세자빈(강빈)은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세자빈은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여인들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환향녀와 이혼하고 다른 여인과 재혼하겠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쑥 들어갔겠네요.

불행히도 아니었습니다. 이 날짜 <인조실록>의 결론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이 뒤로 사대부 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환향녀와) 합하는 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 날짜 실록의 기록자인 사관의 평론도 기가 찹니다.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거늘~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사관은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오랑캐로 만든 자가 최명길”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렇게 당대의 여인들은 못난 임금, 못난 아비, 못난 남편을 만나 붙잡혀 간 것도 모자라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버림받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이럴 수가…”

여인들의 수난은 1637년 1월 22일 ‘금성탕지’(천혜의 요새)로 꼽히던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시작됩니다.

인조는 청나라군이 침략하자 영의정 김류(1571~1648)의 아들인 판윤 김경징(1589~1637)을 강화검찰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결정적인 ‘미스캐스팅’이었습니다. 김경징은 무능한 데다가 자기만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도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피란민들이 수십 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도요. 심지어 소현세자빈(강빈·1611~1646)마저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세자빈이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겠습니까.

게다가 김경징은 적군이 천혜의 요충지인 강화도에 건너올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매일 술만 퍼마시며 주사를 부렸답니다. 그러나 청나라군이 예상과 달리 강화해협을 건너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강화도는 아비규환이 됐습니다.

강화도는 예부터 천혜의 요충지다. 물살이 빠르고 갯벌로 둘러싸인데다 겨울철엔 유빙까지 둥둥 떠다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화도는 예부터 천혜의 요충지다. 물살이 빠르고 갯벌로 둘러싸인데다 겨울철엔 유빙까지 둥둥 떠다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빨리 죽으라”고 눈을 부릅뜬 남편

강화 함락의 장본인인 김경징은 가족들은 팽개친 채 혼자 몸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어머니(류씨·김류의 부인)와 부인(박씨), 며느리 그리고 다른 일가의 여인이 모두 자진했습니다. 김경징의 아내 박씨는 평소 남편에게 “제발 좀 정신을 차리라”고 바른말을 했답니다. 하지만 김경징은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며 힐책했다죠. 그때 박씨는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면 여자라 해서 모면하겠나” 하며 탄식했답니다.

김경징의 아들인 김진표(1614~1671)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머니 박씨를 비롯한 일가 여인들을 다그쳐 자진하게 했습니다.

“적병이 강화도 갑곶진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났다.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해 스스로 죽게 했다.”(<인조실록> 1637년 9월 21일)

강화유수 장신(?~1637)의 어머니도 죽었습니다. 강을 건널 때 내관이 봉림대군(효종)에게 “장신의 어머니가 있는데 어찌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봉림대군은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는데 난들 어떻게 하냐”고 했다네요.

장신의 어머니는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강변에서 죽고 말았는데요. 아들(장신)도 한심하지만, 훗날 임금(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몰인정도 딱하기만 하죠. 상황이 급박해지면 인간에게 짐승의 본성이 나오나 봅니다.

정선흥이라는 인물의 아내는 청나라 군사가 접근하자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1644)에게 달려갔답니다. “영감(회은군)은 우리 아버지와 절친하니 저 좀 살려달라”고요. 그러자 남편인 정선흥이 부인에게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 게 낫다”고 꾸짖었답니다. 아내가 칼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회은군이 남편(정선홍)에게 “빨리 가보라”고 했고요. 가봤더니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답니다. 청군에게 짓밟힐까 두려워 살려달라는 아내에게 “빨리 죽으라”고 겁박하고, 급기야 죽게 만드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을 이야기입니다.

강화도 사수의 명을 받은 검찰사 김경징은 매일 술판만 벌이며 주정을 부렸다. 주변의 충고도 아랑곳없이 아무런 방비책을 세우지 않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화도 사수의 명을 받은 검찰사 김경징은 매일 술판만 벌이며 주정을 부렸다. 주변의 충고도 아랑곳없이 아무런 방비책을 세우지 않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물 위에 둥둥 뜬 여인들의 머릿수건

그뿐이 아닙니다. 배를 탔던 여성 3명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습니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의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당부한 뒤 자진했습니다. 토굴에 숨어 있던 여인은 적병이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고요. 어떤 여인은 청나라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답니다.

<병자록>과 <비어고> 등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면서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습니다.

<병자록>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면서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경향신문 자료사진

<병자록>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면서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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