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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범죄] 팔라완 대학살, 베하르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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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7-0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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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미츠요시 히메타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삼광사전(三光沙殿)"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270만 명 이상"의 중국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히로히토가 직접 승인한 이 초토화 전략은 일본군에게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하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230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판 지아위 학살과 같은 많은 학살이 발생했다. 또한 포로가 된 연합군 군인과 민간인은 다음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에서 학살당했다.

 

팔라완 대학살

(사진 위) 미국 육군 요원들이 1945320일 팔라완에서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 포로로 잡혀 산 채로 불태워진 미국인의 탄 유해를 확인했다(왼쪽). 팔라완 학살 매장지(오른쪽).

 

팔라완 학살은 2차 세계 대전 중 19441214일에 필리핀 팔라완 주의 푸에르토 프린 세사 근처에서 발생했다. 도시 근처에 갇힌 연합군 병사들은 일본 제국군에 의해 139명이 살해되었으며 겨우 11명만이 살아남았다.

 

19441214, 연합군이 전진하면서 포로를 구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이 지휘하는 일본 제14방면군 부대가 포로들을 수용소로 데려왔다. 포로들을 대피소 참호로 유인하라는 공습 경고가 발령되었고, 푸에르토 프린세사 150명의 포로들은 공습 대피소 A, B, C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가솔린 통을 사용하여 대피소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대피소 입구에 가솔린을 뿌린 다음 불을 지른 다음 입구에 몇 발의 총을 쏘아 포로를 맞힌 다음 입구에 있는 죽거나 죽어가는 포로들을 이용해 다른 포로들을 지옥불 속 벙커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그들은 수용소 깊숙한 곳에 있는 대피소 A에서 이 과정을 시작했다. 그 대피소에 있던 몇몇 포로들은 불타는 옷을 가지고 탈출했지만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이를 보고 다른 두 대피소에 있던 포로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파내려고 시도했다. 비교적 다행스럽게도 대피소 BC는 수용소 가장자리의 절벽 옆에 위치해 있어 탈출한 포로들은 두 대피소에 불이 붙기 전에 절벽 방향으로 파내려갔다. 대피소에 불이 붙기 전에 약 20명의 포로가 빠져나온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그 포로들의 경우 일본군은 일부 포로가 대피소에서 탈출하는 것을 보고 사냥대를 보내 탈출한 포로들을 사냥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학살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군 진영으로 돌아온 사람은 11명에 불과했고, 139명이 사망했다.

 

남부 팔라완으로 탈출하여 결국 구출된 11명은 Nazario Mayor의 지휘 하에 있는 필리핀 정찰병과 게릴라의 도움을 받았다. 소식을 접한 Charles A. Willoughby 소장은 해군 PBY Catalina를 파견하여 Brooke's Point 의 정찰병과 합류하여 생존한 POW를 픽업하고 연합군이 통제하는 Morotai 로 날아가도록 했다. 섬에 있던 일본 수비대는 9월에 항복했다.

 

 

베하르호 학살

(사진 아래) 일본 아오바급 중순양함에 대한 미 해군 인정 도면

 

19443, 일본 제국 해군(IJN)의 대형 순양함 세 척이 인도양에서 연합군 함정을 습격했는데, 이 작전의 암호명은 작전명 SA 1호였다. 순양함들은 31일 다른 일본 해군 함정과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출발했다. 39, 이들은 영국 증기선 베하르호를 만나 침몰시켰고, 대형 순양함 톤은 100명이 넘는 생존자를 태웠습니다.

 

베하르 생존자들이 구출된 직후, 사콘주 나오마사 제독은 토네호 지휘관인 하루오 마유즈미 선장에게 무전 메시지를 보내, 불필요한 인원을 포로로 잡고 상선을 탈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책했다. 이 메시지에서 사콘주는 생존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마유즈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기독교적 종교적 신념을 침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꺼렸다. 그의 부장인 준스케 미이 사령관도 포로들을 죽이는 것에 반대했다. 마유즈미는 사콘주에게 포로들을 해안으로 보내달라고 무전으로 요청했지만, 이는 거부되었다. 선장은 아오바를 방문하여 자신의 주장을 주장했지만, 사콘주는 움직이지 않고 마유즈미에게 "내 명령을 따르라"고 말했다. 마유즈미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3153척의 중순양함이 자바 근처 탄중프리오크에 정박했다. 이후 15명 또는 36명의 생존자가 아오바로 이송되었다. 아오바 로 보내진 일행에는 베하르호의 최고 책임자인 시몬즈와 여러 고위 임원, 그리고 배의 여성 승객 두 명이 포함되었다. 이 일행은 모두 나중에 탄중프리오크에 상륙했다.

 

3척의 순양함은 318일 탄중프리오크에서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날 밤, 토네호에 있던 모든 수감자들은 순양함의 여러 장교들에 의해 참수 당했다. 마유즈미는 배의 선장실에서 학살을 지켜보았지만 참여를 거부했다. 처형된 선원의 수는 65명에서 최소 100명 사이였다.

 

전쟁이 끝난 후 습격의 지휘관인 사콘주 나오마사 제독은 이 전쟁 범죄로 처형되었고, 토네호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war_c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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