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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타파연대

화성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구술자료집 3 - 고종학의 고생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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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3-11-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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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구술자료집 3 - 고종학의 고생담 (1) 


소개할 사례는 시베리아-일본 시즈오까로 징용을 다녀온 고종학이란 분의 것이다.  


고종학은 19세에 징용에 나갔는데,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은 형님 두 분이 계셨으나, 큰 형님은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둘째 형님은 독립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직이었던 고종학이 징용 대상이 되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마을에서도 돈이 좀 있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면이나 구장에게 돈을 좀 멕이고 대상에서 빠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고종학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전혀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는데, 당시 면에서는 동네마다 야학을 세워 무학자들에게 글을 지도했고, 동네에서는 저녁 8~9시 경 야학을 개최했다. 


이 야학은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이 주도한 농촌진흥운동의 핵심 사업 중의 하나였고,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농민들에게 조선어와 일본어를 가르쳤다.

고종학의 경우에는 약 3년간 야학에서 조선글을 공부했고, 일본글은 시간이 부족해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우가키의 농촌진흥운동을 카피한 것이다.)


징용자들은 부산까지 조선인 면직원의 인솔 하에 갔으며, 부산항에서 징용으로 가서 일하게 될 회사 소속 직원(조선인)이 이들을 인계받아 배에 태워졌다.


*


[ 진술 내용 ]


질문) 이동하는 동안에 그 데리고 가던 사람들이 대우라든가 잘 해주던가요? 식사라든가. 

고종학) 어(예). 그때 나갈 때는 뭐, 그냥 그대로.


질문)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동하는 과정에서?

고종학) 예. 


- 첫번째 작업장이 있던 사할린의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못 견디겠다며


질문) 다른 데로 보내달라는 얘기를 누가 주로 주도가 돼서 얘기가 나왔어요?

고종학) 그 우리가 인제 단합이 돼서 그런 거지. 여기서는 추워서 못살겠으니까 더운 곳으로 보내다오. 죽어도 더운데 가서 죽어야지 여기 추워서 어떻게 사느냐 그런거지. 


질문) 그 비행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게 요구를 하고 그랬어요?

고종학) 어.


질문) 뭐 어떻게 큰 소리가 나고 하여튼 그런 게 있었나요?

고종학) 그렇지. 


질문) 그래도 폭력행사 같은 건 없었나 봐요?

고종학) 어.


질문) 생필품이라든가 양말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다 지급이 됐어요?

고종학) 어. 거기서 다 줘. 


질문) 충분히 나왔어요?

고종학) 어. 근데 거기서 나올 때는 이 옷을 다 반납하고 나와. 


질문) 그러면 처음에 갈 때 임금이 얼마라는 얘기는 했었어요?

고종학) 어. 


질문) 얼마래요?

고종학) 30원 


질문) 어떻게 받았어요?

고종학) 거기서 월급날이면 나와. 한달 되면. (중략) 고향으로 송금할 사람은 송금해라. 그런데 고향으로 얼마 부쳐준다 하면 월급에서 이제 부쳐주지. 나는 거 가서 석(3)달치만 부치고서 나올 적에 그냥(가져왔어)


질문) 받아서 뭘 하셨어요?

고종학) 받아서 그냥 집으로 가져왔지. 


질문) 그거 왜 송금 안하시고 직접 받을 생각을 하셨어요?

고종학) 집에 와서 쓸라고. 


질문) 한 달에 30원씩 다 받기는 하셨어요? 나올 때? 못 받고 이런 건 없었어요?

고종학) 다 받았어. 


질문) 그러면 아파서 하루 못 나간다든가 이러면 임금에서 공제돼요?

고종학) 예.


질문) 그면 주변에 같이 일하던 분들 중에 다치거나 죽거나 한 사람도 있었어요?

고종학) 저기 뭐 죽거나 한 사람은 없고 다쳐가지고 병원에 가 좀 있다가 나온 사람도 있고. 


질문) 근처에 병원이나 그런 시설들이 어디에 갖추어져 있어요?

고종학) 어. 거기서 가깝게. 


질문) 감독하고 그러는 사람이 일본인이에요?

고종학) 일본인도 있고 한국 사람도 있고. 여기서 가는 도중에 그 뭐여 공부를 좀 한 사람은 반장으로 뽑혀 나가고 그러지. 


질문) 사할린 비행장에서는 잘 먹었다고요?

고종학) 어. 잘 먹었어. 


질문) 여가 시간이나 쉬는 시간도 좀 있었어요?

고종학) 일주일에 한번씩 쉬는 거지. 


질문) 그럼 임금을 다 받았고 일본에서 올 때 가지고 나오셨다는 말씀이시죠?

고종학) 예.


질문) 얼마나 저축해서 가지고 나오셨어요?

고종학) 돈 팔백(800)원. 한국에 나오니까 쌀 한말에 십원이었어. 10원.


질문) 그럼 800원이면 굉장히 많은 돈인 거네요?

고종학) 어. 


- 사할린에서 추위를 구실로 단합하여 항의한 결과 일본 본토의 시즈오까로 이동 배치된 후


질문) 비행장 근처에 술집이라든가 여자집이라든가 간혹 가는 사람들이 있던가요?

고종학) 그때 뭐여 유곽이라고 있지. 하루 저녁 놀고 오면 5원 주는 거여. 일요일 날이면 걸어서 갔다 오고 그래. 


질문) 유곽에 그럼 조선인들, 조선인 여성들이 있다든가요?

고종학) 예, 한국인들. 유곽에 갈 사람들 있느냐. 뽑으면 그 사람들 표 해주면 가는 거여. 


질문) 갈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중에서 뽑기도 하고 그래요?

고종학) 어. 


질문) 고향에 연락이나 이런 건 원활하게 했어요?

고종학) 어. 연락은 했지. 편지 왕래하고. 


질문) (시즈오까)비행장에 있을 때 사고, 사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고종학) 사망하는 사람들 있지. 


질문) 죽으면 어떻게 하던가요?

고종학) 죽으면 전부 화장을 해서 화장터에서 죄(모두) 처리하는 거지. 


질문) 유족한테 보내는 거라든가 이런 건 제대로 하던가요?

고종학) 어. 


질문) 그래서 어쨌든 시즈오까에서 어르신은 다치거나 이런 적은 없으신 거죠?

고종학) 어. 


질문) 우정(면), 장안면 사람들은 희생되신 분은 한 분도 안 계신거죠?

고종학) 어. 


-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질문) 당시 농사에 대하여

고종학) 그때는 무조건 남의 땅을 (소작)하면 이렇게 반씩 노놔 먹는 거여. 농사 지어가지고. 내가 농사지으면 땅 임자하고 반씩 이렇게 노놔 먹는 거여.  

.. 그때는 농사짓기 어려웠어요. 왜냐면 논두렁에 피 하나만 있어도 벌금을 받아가요. 


질문) 자기 논에 피가 있어도요?

고종학) 예. 그래 깨끗하게 해 먹으라는 뜻이지.


질문) 그러면 피 같은 거 생기면 바로바로 가서 뽑고 해야겠네요?

고종학) 예, 그러고 이 집안에도 지저분하게 하지 말고 깨끗하게 살라고 청결조사라고 있어요. 청결조사. 


질문) 아 그런 것도 막 강제로 지시하고 그러나 봐요?

고종학) 예 


질문) 그런 걸 조사하러 나와요?

고종학) 나오죠. 그 전에는 나무만 땠어요. 나무. 그래서 아궁이가 있으면 아궁이 뚜껑도 해 덮으라고 하고 굴뚝도 저 연기 나가는 거 노깡을 채우라고 그러고 그 때는 심했어요. 


질문) 그런 거는 사실 필요한 일이잖아요. 

고종학) 그렇죠. 그거는 참 일본 사람들이 잘한 거여. 지시를 잘 내린거여. 

밤에는 도둑 맞지 말라고 순경을 돌아요. 야경을 돈다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야경을 돌았다)


질문) (동네에서) 야학이 열리면 나이 많은 사람도 배우러 가고 그랬겠네요?

고종학) 예. 어우, 그때는 환갑 진갑 지난 노인네들 죄 배우라고 저기 시키는거여. 


질문) 그래서 그게 이제 생활이 내면화 됐어요? 그 후에도 생활습관이 계속 갔어요? 그런 식으로 한 게?

고종학) 어, 8.15 해방되고도 그거는 노냥 했다고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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