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의 조선인들: 증인 류영렬 - 아사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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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8-08 16:49본문
일제시대에 사도에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강제동원> 이라고 하며, 학대와 가혹한 환경을 강조한다.
일본에서는 <취업> 이라고 하며, 일본인 노동자와 같은 대우였다고 강변한다.
류영렬씨는 사도 광산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사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한일간의 <강제연행>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 전인
2002년의 기사인데,아래 기사를 보고 과연 학대와 공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까?
공포와 학대의 섬이었는데,
해방후 어린소년이 한반도로 돌아가기 싫다고 했을까?
나이가 들어서
'사도는 고향이다'
'일본식 이름에 거부감이 없다' 같은 말을 할까?
판단은 각자가...
by SY Che
------------ 이하 기사 인용 (마지막에 원문 포함) ------------
■ 전후 45년이 지났다.
'오오카와(大川)군!'
사도의 아이카와 초등학교 동창회. 와타베 무츠오 씨(71)는 정장 차림의 류영렬 씨(71)를 발견하자마자 무심코 말을 걸었다. 사도에서 초등학교, 구제중학교 시절을 보낸 류씨가 다시 섬에 발을 들여놓았다.
"무짱"
류 씨도 웃으며 대답했다.
류 씨는 서울에서 직원 천여 명을 거느린 1부 상장 건설회사의 전무가 되어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까지나 그는 오오카와(大川)니까."
와타나베 씨는 류 씨를 소년 시절처럼 부른다.
'오오카와 쇼로쿠(大川昭六)'
전쟁 중에도 류 씨는 그렇게 불렸다.
■학급의 인기인
1910년 한일병합. 류씨의 아버지는 이듬해 농학교를 졸업하고 군수의 보좌관 겸 통역관이 되었다. 일본화가 진행되면서 사상 탄압이 반복되었다. 아버지 역시 일본 고등경찰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어느 날 일본 경찰과 말다툼이 벌어져 조선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결혼하고 삼조시(三条市)로 갔다. '오오카와'라는 이름으로 고철을 수집하는 고물상을 운영했다. 고철을 공장에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쇼와 5년(1930년),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쇼로쿠'라고 지었다. 사도 광산에서 나오는 고철을 찾아 사도섬으로 건너갔다.
아이카와 초등학교에 입학. 와타베 씨를 만나 6년 동안 같은 반이 되었다. 류씨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한반도 사람들을 '선인(鮮人)'
'반도인'이라고 부르며 차별하던 시대. 하지만 류씨는 인기인이었다. 자습 시간에는 "야, 오오카와(大川). 무슨 얘기 좀 해봐".
반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동네 대여점에서 빌린 동화를 들려주었다.
"아주 잘했지. 억양을 넣어서 말이야. 지옥에 간 세 사람이 염라대왕을 곤란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라고 와타베 씨는 말한다.
졸업 후 두 사람은 다른 구제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중 학생 동원으로 니가타시에 있는 니가타 철공소로 가게 된다. 한 방에 10명씩 생활하는 기숙사에 들어가 전기 용접을 했다. 불에 타서 두꺼운 철이라고 느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폭약을 실은 소형 특수선박이란 것을 알았다. 종전. 옥음방송은 공장에서 들었다.
45년 9월. 류씨와 가족은 후쿠오카에 있었다. 조선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입에서 일본어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이 조선어로 대화를 나눈다. "싫어요. 싫다" 라고 일본어로 말하였다. 결국 류 씨의 입에서도 일본어가 사라졌다.
■동창생의 한마디
재회는 우연이었다.20년 전. 도쿄에 사는 류 씨의 사촌이 아이카와초의 료칸을 방문했다. 류 씨의 초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다. 류 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오오카와에게 연락하고 싶다". 동창생의 한 마디가 류 씨와의 교류로 이어졌다.
"오오카와, 잘 지냈어?"
"한국전쟁 때 힘들었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외국에서 일부러 찾아와줘서 반가웠다. 류씨에게 '오오카와'이라는 이름은 거부감이 없다. 사도에서 보낸 그 이름은 추억 그 자체다.
"사도는 고향"
류 씨는 그리운 듯 그렇게 말한다.
올해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 주최하는 축구 월드컵이 열린다. "일본은 예로부터 조
조선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정복당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은 정복당한 날
본인을 증오한다. 풀리지 않았던 양국이 이제라도 손을 잡게 되어 기쁘다"고 류씨는 말한다.
지난해 말, 류 씨가 일본어로 쓴 연하장이 한발 앞서 와타베 씨에게 도착했다.
"2년 동안 아이카와에 가지 않았는데, 올해는 불러주실 것 같네요."
동창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劉英烈さん(いま隣人と サッカーW杯を前に:1)
■ 終戦から45年が過ぎていた。
「大川くんっ」
佐渡の相川小学校の同窓会。渡部睦男さん(71)は、スーツ姿の劉英烈さん(71)を見つけたとたん、思わず声をかけた。佐渡で小学、旧制中学時代を過ごした劉
さんが、再び島に足を踏み入れた。
「むっちゃん」
劉さんも笑みで答えた。
劉さんはソウルで、従業員約千人の1部上場の建設会社の専務となっていた。ほころぶ口元はあのころのままだった。
「いつまでたっても彼は大川ですから」
渡部さんは劉さんを少年時代のころのように呼ぶ。
「大川昭六」
戦時中、劉さんはそう名乗っていた。
■学級の人気者
1910年の日韓併合。劉さんの父親がその翌年、農学校を卒業、郡主の補佐官兼通訳となった。日本化が進められ、思想弾圧が繰り返された。父親もまた、日本の高
等警察に絶えずマークされていた。ある日、日本の警官と口論となり、朝鮮にいられなくなった。日本に渡った。
結婚して三条市に行った。「大川」と名乗り、古鉄を集める古物商を営んだ。くず鉄を工場に売りながら食いつないでいた。昭和5年(1930年)、息子が生まれ
た。「昭六」と名づけた。佐渡鉱山で出るくず鉄を求め、佐渡島に渡った。
相川小学校に入学。渡部さんと出会った。6年間、同じクラスだった。劉さんが外国人だということは、みな知っていた。朝鮮半島の人たちを「鮮人」
「半島人」と呼び差別していた時代。でも、劉さんは人気者だった。自習時間には「おい、大川。何か話をしてくれ」。
クラスメートのリクエストにこたえ、近所の貸本屋で借りた童話を話した。
「うまかったなあ。抑揚を込めてね。地獄へ行った3人が、えんま様を困らせてしまう話なんて今でも思い出す」と渡部さん。
卒業後、2人は違う旧制中学に入った。
やがて、学徒動員で新潟市の新潟鉄工所へ。一部屋10人の寮に入り、電気溶接をした。やけに厚い鉄だと感じていた。のちに、爆薬を積んだ小型特殊船艇だと知っ
た。終戦。玉音放送は工場で聞いた。
45年9月。劉さんと家族は福岡にいた。朝鮮行きの船を待っていた。両親の口から日本語が出ることは、なかった。両親が朝鮮語で会話をする。「いやだ。いやだ」
と日本語でごねた。やがて劉さんの口からも日本語が消えていった。
■同窓生の一言
再会は偶然だった。20年前。東京で暮らす劉さんのいとこが相川町の旅館を訪れた。劉さんの小学時代の同窓生が営んでいた。劉さんのことが話題になった。
「大川に連絡をとりたい」。同窓生の一言が、劉さんとの交流に結びついた。
「大川、元気だったか」
「朝鮮戦争は大変だったな」
話は尽きなかった。外国からわざわざ来てくれて、うれしかった。劉さんにとって、「大川」の名に抵抗はない。佐渡で過ごした、あの名前は思い出そのものだ。
「佐渡は故郷」
劉さんは懐かしそうに、そう語る。
今年、日韓共催のサッカーワールドカップ(W杯)が開かれる。「日本は昔から朝
鮮半島に住む人たちを、征服された人たちだと根底に思い、また、韓国は征服した日
本人たちを憎む。打ち解けることがなかった両国がいま、手をつなぐことはうれし
い」と劉さんはいう。
昨年末、渡部さんのもとに劉さんから日本語で書かれた年賀状が一足早く届いた。
「2年間、相川に行っていないが、今年は呼んでくれるんだろう」
同窓会はいまも続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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