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범죄] 발릭파판 학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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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7-11 00:50본문
역사가 미츠요시 히메타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삼광사전(三光沙殿)"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270만 명 이상"의 중국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히로히토가 직접 승인한 이 초토화 전략은 일본군에게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하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230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판 지아위 학살과 같은 많은 학살이 발생했다. 또한 포로가 된 연합군 군인과 민간인은 다음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에서 학살당했다.
● 발릭파판 학살
발릭파판 학살은 1942년 2월 24일 일본 제56사단이 항구 도시 발릭파판 인근에서 무장하지 않은 네덜란드 민간인과 전쟁포로 78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1942년 1월 20일, 네덜란드 왕립 동인도 육군·공군이 발릭파판으로 향하는 작은 선박을 발견했다. 비행선이 선박 근처에 착륙했고, 그 안에 네덜란드 왕립 동인도 육군 대위 2명이 탑승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은 잡혀서 타라칸에서 네덜란드 포로 215명이 학살당하는 것을 면했다.
일본의 점령 이전에 이곳 유전이 파괴되었다. 발릭파판의 유전이 비슷한 운명을 맞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일본을 대신하여 발릭파판 유전이 파괴되면 모든 네덜란드인이 즉결 처형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의 최후통첩은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는데, 지휘관인 C. 반 덴 후게반트 중령이 즉시 폭파팀에 발릭파판 유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월 23일 밤과 1월 24일 아침에 일본군이 발릭파판 근처에 상륙했는데, 네덜란드 군인들이 그 지역에서 탈출을 시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유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군은 네덜란드 포로 62명과 공무원 2명, 경찰 감독관 1명, 의무관 1명, 발릭파판 병원의 환자 8명, 사제 3명을 포함한 나머지 네덜란드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2월 23일에 모든 포로가 해변으로 끌려갔고, 공무원 2명은 참수당했고 나머지는 바다로 쫓겨나 약 2시간 동안 한 번에 한 명씩 총살당했다. 이웃 마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 끌려왔다.
●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학살
일본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령 보르네오와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를 점령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의 일본 점령은 다른 전쟁터에서와 마찬가지로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일본의 처우가 매우 열악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탈진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 주민들의 쌀과 같은 식량이 일본군에게 전용되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 출신 인도네시아인 4백만에서 1천만 명이 일본의 강제 노동자로 끌려가 로무샤라고 불리는 강제 징용을 당했다. 기근과 강제 노동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에서 400만 명이 사망했다. 국제 적십자 패키지는 포로들에게 배포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에서는 포로 학살과 처형이 모두 발생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war_c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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