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범죄] 웨이크섬 학살, 틴타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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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7-10 03:43본문
역사가 미츠요시 히메타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삼광사전(三光沙殿)"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270만 명 이상"의 중국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히로히토가 직접 승인한 이 초토화 전략은 일본군에게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하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230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판 지아위 학살과 같은 많은 학살이 발생했다. 또한 포로가 된 연합군 군인과 민간인은 다음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에서 학살당했다.
● 웨이크섬 학살 사건
(사진 위) 98 바위
1943년 10월 5일, 렉싱턴에서 출발한 미 해군 항공기가 웨이크를 공습했다. 이틀 후 일본 해군 대위 시게마쓰 사카이바라(Shigematsu Sakaibara)는 절도 혐의로 체포된 미국인 민간인 노동자를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와 다른 97명은 처음에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침략을 두려워한 사카이바라는 그들 모두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섬의 북쪽 끝으로 끌려가 눈을 가리고 기관총으로 처형당했다.
포로 중 한 명(이름이 밝혀지지 않은)은 탈출하여 희생자들이 급히 집단 무덤에 묻힌 곳 근처의 큰 산호 바위에 "98 US PW 5-10-43"이라는 메시지를 새기기 위해 현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신원 미상의 미국인을 생포한 사카이바라는 그를 직접 카타나(日本刀)로 참수했다. 바위에 새겨진 비문은 지금도 볼 수 있으며 웨이크 아일랜드의 랜드마크이다.
후일 미국에 구금되어 있던 일본 장교가 이 사건으로 자살했으며 사카이바라를 유죄로 만드는 서면 진술을 남겼다. 사카이바라와 그의 부하인 타치바나 중령은 나중에 이 사건과 다른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카이바라는 1947년 6월 19일 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타치바나의 형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살해된 민간인의 유해는 호놀룰루에 있는 펀치볼 분화구로 알려진 태평양 국립기념묘지의 G 구역에서 발굴되어 다시 매장되었다.
● 틴타 학살
괌의 메리 조 근처에 있는 틴타 대학살 유적지는 1944년부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틴타(66-06-1223) 로도 알려진 이곳은 1991년에 국가 사적지에 등재되었다. 이 목록에는 기여한 유적지 한 곳과 유물 한 건이 포함되었다.
이곳은 1944년 7월 15일, 섬이 해방되기 6일 전에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곳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다. 메리조 마을에서 30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는데, 16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시체로 방치되었다. 죽은 사람 중 한 명은 "전쟁 전 저명한 교육자"인 마리아 L. 메사 여사였다. 1991년에 이 장소는 십자가로 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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