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범죄] 마닐라 대학살 (마닐라 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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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7-11 00:29본문
역사가 미츠요시 히메타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삼광사전(三光沙殿)"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270만 명 이상"의 중국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히로히토가 직접 승인한 이 초토화 전략은 일본군에게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하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230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판 지아위 학살과 같은 많은 학살이 발생했다. 또한 포로가 된 연합군 군인과 민간인은 다음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에서 학살당했다.
● 마닐라 대학살
(사진) 1945년 2월 10일 일본군이 불태운 교외에서 안전을 위해 달리는 마닐라 시민들
마닐라 학살은 ‘마닐라 강간’으로도 불리며, 일본군이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에서 필리핀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잔혹 행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마닐라 전투(1945년 2월 3일 ~ 1945년 3월 3일) 동안 일본군의 학살을 포함한 모든 원인으로 인해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마닐라 학살은 전후 군사재판에서 판단한 대로 일본 제국군이 저지른 여러 주요 전쟁 범죄 중 하나였다. 일본 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그의 참모장 무토 아키라는 1945년 10월에 시작된 재판에서 학살과 다른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졌다. 야마시타는 1946년 2월 23일에, 무토는 1948년 12월 23일에 처형되었다.
마닐라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마닐라 시로 진격했다. 도시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가 교착되는 동안 일본군은 분노와 좌절을 도시의 민간인들에게 표출했다. 산 후안 데 디오스 병원, 산타 로사 대학, 산토 도밍고 교회, 마닐라 대성당, 파코 교회, 성 바울 수녀원, 성 빈센트 데 바울 교회를 포함한 학교, 병원, 수녀원에서 폭력적인 상해, 강간, 학살이 발생했다.
Antonio Gisbert 박사는 Palacio del Gobernador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이 살해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Fort Santiago 에 몰려들어 이틀 후에 학살당한 가운데 50명도 안 되는 소수의 생존자 중 한 명입니다.”
일본군은 필리핀 여성과 어린이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여 일본군의 진지를 보호하기 위해 최전선으로 투입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게릴라를 몰아내기 위해 북부 마닐라를 청소 작전을 수행하여 마을을 지나가는 어린이를 포함한 54,000명 이상의 필리핀인을 처형했다. 임신한 필리핀 여성들은 배가 찢어지는 죽음을 당했고, 도망치려는 필리핀 민간인들은 처형당했다.
베이뷰 호텔은 지정된 "강간 센터"로 사용되었다. 야마시타 전범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마닐라의 부유한 에르미타 지구에서 400명의 여성과 소녀들이 모아져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25명의 여성을 뽑는 선발위원회에 제출되었다. 대부분이 12~14세였던 이 여성과 소녀들은 호텔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일본군 병사와 장교들이 교대로 그들을 강간했다.
후일 전범 재판에서 야마시타 장군은 마닐라 학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와부치 제독의 해군이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야마시타는 이전에 그에게 마닐라 대피를 명령했었다고 한다. 이와부치 자신은 마닐라 전투가 끝나갈 무렵 임박한 패배에 직면하여 자살했다. 결과적으로 야마시타는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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