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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범죄] 바탄 죽음의 행진, 산다칸 죽음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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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7-1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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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미츠요시 히메타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삼광사전(三光沙殿)"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270만 명 이상"의 중국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히로히토가 직접 승인한 이 초토화 전략은 일본군에게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하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230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판 지아위 학살과 같은 많은 학살이 발생했다. 또한 포로가 된 연합군 군인과 민간인은 다음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에서 학살당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

(사진 위) 1942년 바탄 죽음의 행진 이후, 타를락의 카파스에 있는 캠프 오도넬에서 미군과 필리핀 전쟁포로의 매장 모습. 이들은 즉석에서 만든 들것을 이용해 전사한 동지들을 운반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은 일본 제국군이 바탄 반도의 바가크와 마리벨레스 시에서 산 페르난도를 거쳐 캠프 오도넬로 75,000명의 미국인과 필리핀 전쟁 포로들을 강제로 이송한 사건이다.

 

이송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에서 3개월간 진행된 바탄 전투가 끝난 후 194249일에 시작되었다. 마리벨레스에서 산 페르난도까지, 그리고 카파스 기차역에서 여러 수용소까지 행군한 총 거리는 65마일(105km)에 달했다. 행군 중 5,000~18,000명의 필리핀인 사망자와 500~650명의 미국인 사망자 등 캠프 오도넬에 도착하기 전 포로 사상자에 대한 소식통의 보고도 매우 상이하다.

 

행진은 심각한 신체적 학대와 무자비한 살육이 특징이었다. 땅에 쓰러지거나 붙잡힌 포로들은 총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장군과 그의 장교 두 명인 가와네 요시타카 소장과 히라노 쿠라타로 대령은 전쟁 범죄 혐의로 미국 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고 부하들의 잔학 행위를 막지 못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혼마는 1946, 가와네와 히라노는 1949년에 처형되었다.

 

 

산다칸 죽음의 행진

(사진 아래) 19451024,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수용소가 파괴된 지 몇 달 후의 산다칸 포로 수용소. 1번 컴파운드에서 300명의 호주 및 영국 포로의 시신이 담긴 무덤이 나중에 발견되었다. 이들은 2차 행진 이후 수용소에 남겨진 사람들로 여겨진다. 각 무덤에는 여러 개의 시신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10명이나 되었다.

 

산다칸 죽음의 행진은 보르네오에서 산다칸에서 라나우까지 강제로 행해진 일련의 행진으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역 동안 일본제국에 의해 북보르네오의 산다칸 포로 수용소에 포로로 잡혀 있던 연합군 전쟁 포로 2,434명이 사망했다.

 

종전 당시 산다칸과 라나우에 수감되었던 모든 포로 중 생존한 호주인은 6명에 불과했는데 모두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은 2차 세계대전 중 호주 군인들이 겪은 최악의 잔혹 행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war_c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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