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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환초] 마셜제도 밀리 환초의 칠봉도 사건 (J위키) 자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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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6-2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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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봉도사건(七峰島事件)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3월 마셜제도 밀리 환초의 칠봉도(七峰島, Chirubon island)에서 섬 주민과 조선인 군속이 일으켰다고 한국 측이 주장하는 반란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1945, 마셜 제도는 이미 미군에 의해 제해공권을 빼앗긴 상태였다(길버트 마셜 제도 전투 참조). 디딤돌 작전으로 미군이 지나가면서 고립된 섬에서는 만성적인 기근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사건이 발생한 밀리 환초에 주둔하는 일본 해군 제66 경비대는 경비대 사령부가 있는 밀리 섬 한 곳에 모여 있던 각 부대를 밀리 환초의 각 섬에 분산 배치하고, 식량은 자급자족하기로 했다. 병사들은 쥐, , 물고기 등을 먹으며 굶주림을 극복하는 한편 섬 곳곳에서 식량을 징발하기도 했는데, 이에 항의하는 칠봉섬의 촌장을 일본군 한 명이 살해해 섬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

밀리 환초에 주둔하고 있던 제66경비대는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관련 자료도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제66경비대 사령관 시카 마사나리(志賀正成) 대령도 부하가 일으킨 미군 승무원 포로 처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패전 후 수용지인 괌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진상은 불분명하다. 또한 이 사건의 일본인 당사자의 증언도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 내용에서 1952년 일본 제2복원성 직원이 작성한 '구 해군 군속 신원조사표'에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된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며, 신원조사표에는 당시 반란 진압에 참여했던 나카가와 기요토(中川清人) 해군 대위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족 군무원의 증언

아래 내용은 모두 한국 측의 증언이다. 또한 수기 자체는 공개되지 않아 향후 검증을 기다려야 한다.

 

전 조선인 군속 중 한 명이 1985년에 남긴 수기 내용에 따르면,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인 군속이 조선인 군속에게 '고래고기'라고 표현한 것을 선심 쓰듯 건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인 군속은 이를 수상하게 여겼지만 배고픔에 그 고기를 먹었다. 며칠 후, 연초에 행방이 묘연했던 동료 조선인 군속 1명이 인근 무인도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시신의 허벅지에는 부자연스럽게 잘린 부분이 있었고, 그들은 "저 고기는 동료의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며칠 후 또다시 조선인 군인 한 명이 실종되었다가 비슷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공포에 질린 조선인 군속들은 섬에서 탈출을 생각했고, 일본인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조선인 군속을 리더로 삼아 섬 주민들과도 공모해 일본군에 대한 반란을 계획했다. 섬 주위에 미군 함정이 항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속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1945318일 반란을 일으켜 총격전 끝에 7명의 일본군속을 살해하고 섬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한 조선인 군속이 이를 이웃 루크놀 섬의 일본군 부대에 밀고하여 이날 오후 3시경 50명에서 60명 정도의 토벌대에 의해 기관총을 사용하는 등 진압됐다


결국 14명 정도의 조선인 군속을 제외한 반란군 측이 거의 모두 사살되는 결과로 끝났다. 조선인 군속 60명과 반란에 가담한 도민 4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란을 주도한 5, 6명은 많은 동료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서로 껴안고 다이너마이트로 자결했다. 투항한 조선인 17명도 루크놀 섬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등의 내용이 수기에는 적혀 있었다고 한다.

 

2000년에 사망한 또 다른 전 조선인 군속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섬에 있던 일본인 군속은 20, 조선인 군속은 125명이었고, 1945223일 또는 27일에 인접한 무인도에 식량을 구하러 간 조선인 군속 각 1명씩이 일본인 군속 2명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2명은 피해자의 고기를 먹은 후 남은 고기를 칠봉도로 가져가 '고래고기'라 칭하며 동료 일본인에게 먹였다고 한다


이튿날인 28, 2명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걱정한 조선인 군속 몇 명이 무인도에 가서 식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은 그 '고래고기'라고 표현하는 것을 먹지 않았으며, 반란이 일어난 날은 318일이 아니라 31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웃 루크놀 섬에서 일본군 부대가 온 것은 조선군속의 밀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칠봉도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속과의 총격전을 피해 도망친 일본인이 알려준 것으로, 살해된 조선군속의 숫자도 100명이라고 밝혔다.

 

숨어 살아남은 14명의 조선인 군속은 사건 후 인근을 항해하던 미군 함정에 도움을 요청해 투항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은 사건의 개요인데, 위와 같이 증언자의 기억에 의한 것인지, 사건의 내용이 세부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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