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담론] 내것과 같은 크기의 성기구를 / 下川 耿史 > 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성담론] 내것과 같은 크기의 성기구를 / 下川 耿史 > 자료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img

자료실

한일갈등타파연대

[성담론] 내것과 같은 크기의 성기구를 / 下川 耿史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3-11 08:08

본문

[성담론] 내것과 같은 크기의 성기구를

by 시모카와 코시 (下川 耿史: 저술가, 풍속사가)


"내 것과 같은 크기의 성性기구를" 한국전쟁 중 미군의 주문 쇄도

... 맥아더도 들른 '일본 최초의 섹스 숍'
'성풍속 50년 나와 쇼와 시대의 에로 사사(事師)들'


전후에 태어난 풍속사학자 시모카와 겐사(下川耿史)씨는 유명무명을 불문하고 전후 일본 사회에서 새로운 에로의 지평을 개척한 사람들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여기서는 『성풍속 50년 나와 쇼와 시대의 에로 사사들』(筑摩書房)에서 일본 최초의 섹스 숍 '아카후네 약포(あか船薬舗)'의 일화를 발췌해 소개한다.

- 맥아더도 들렀다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군에 항복한 것은 1945년 8월 15일, 8월 30일 맥아더 원수가 가나가와현 아쓰기 비행장에 도착해 요코하마의 그랜드 호텔에 들어갔다. 그리고 3일 후인 9월 2일, 도쿄만 위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어 일본은 공식적으로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로부터 6일 후인 9월 8일, 맥아더는 그랜드 호텔을 출발해 도쿄 히비야의 점령군 총사령부에 들어갔다. 그 사이, 아마도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린 다음 날인 9월 3일부터 도쿄로 향하기 전날인 7일까지 5일 동 맥아더는 성 풍속사에 기록에 남을 만한 행동을 했다. 요코하마 사쿠라기초에 있는 섹스 숍 '아카후네'를 방문한 것이다.

경영자 가모 히로유키(加茂寛龍)는 개인 저서 『아카후네의 모든 것』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있었다, 있었다, 확실히 맥아더였다. 사진으로 익숙한 그 복장으로 파이프를 문 장군을 수행한 총 6명이 (상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섹스 숍이라니, 특이하네요. 간판이 눈에 띄어서 들렀어요. 잠시 구경 좀 할게요."

 30분 정도 가게에 머물렀고, 역시나 쇼핑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 좋게 돌아갔다."

 내가 '아카후네'라는 섹스 숍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학창시절이었다. 친구 몇 명과 함께 요코하마에 놀러 갔을 때 한 친구가 사쿠라기초에 가자며 이 가게에 데려다 준 것이다. 친구는 우리에게 '이곳이 맥아더가 들렀던 섹스 숍이라고 설명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중략)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주간지 편집부에 소속되어 있을 때였다. 그때부터 그것이 일본인과 미국인의 성에 대한 감각의 차이인지, 그리고 그것이 일본과 미국의 감각 차이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인지 계속 궁금했다. 그런 기억도 있고, '아카후네'를 취재하고 싶다는 것은 프리랜서 작가가 되었을 때부터의 염원 중 하나였다. 가모 간류(加茂寛龍)의 아들이자 2대째인 가모 가즈오(加茂和夫)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봄이었다.

1929년 9월, 간류가 27세 때인 1929년 9월에 섹스 숍 '아카후네'가 문을 열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일본 최초의 섹스 숍이다.

 간류는 1902년 6월 가가와현 마루가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일전쟁에 참전한 전직 대위였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간류는 장래에 만주에서 한 획을 긋는 것이 소년 시절부터의 꿈이었고, 타쿠쇼쿠대학(拓殖大)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만주에서 자동차 운송업을 하고 싶어 당시로서는 드물게 운전면허도 취득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1928년 6월, 만주 봉천(奉天) 교외에서 장작림 사건(張作霖爆殺事件)이 발생해 만주 여행이 일시 금지되었다. 금지령이 풀리면 바로 여행할 생각이었지만, 그 전까지의 연결고리로 섹스 숍을 연 것이다. 중국은 성문화의 나라이니 성에 대한 지식을 쌓아두는 것이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시대는 그대로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15년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간류에게 있어 생계비와 어학공부를 겸해 개업한 '아카후네'는 그대로 본업이 된 것이다.

(중략)

 전황이 내리막길을 걷던 1943년인가 44년이었다. 사가미하라(가나가와현)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호출장이 왔다. 당시 전황으로 보아 간류는 '섹스 숍 따위는 폐쇄하라'는 명령인 줄 알고 나갔더니, 군의관 대위가 '무능력자가 섹스를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달라'는 명령이었다. 전쟁터에서 보내오는 부상병 중에는 사타구니를 맞아 성性불능에 빠진 병사들이 상당수 있었다. "군국(軍國)의 아내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앞으로 10년, 20년 동안 부부관계 없이 지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 은사(恩賜: 천황으로부터 받음)의 의경(恩賜: 인공성기)은 주어져도 좋을 것이다

 사실 간류는 평소 팔다리를 다친 병사를 위해 은사의 의수나 의족이 있다면 음부를 잃은 병정에게 은사의 의경이 주어져도 좋을 것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군인치고는 말을 알아듣는구나 하고 감탄하여 수락했다고 한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타수케부네(助け舟)'라는 성기구로, 골절되었을 때 부목을 하는 것처럼 성기를 골절된 뼈에 비유하여 고무 고리를 끼워 양 끝과 가운데를 고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를 제작한 사람도 만주사변으로 음부 신경이 끊어졌다는 전직 군인으로, 성적 욕망과의 괴리감에 시달리다 '아카센(あか船)'으로 성기구의 장인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나 많은 숫자가 만들어졌는지는 카즈오가 알 수 없다고 한다. 당시 고무는 통제품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친 용도'에 사용할 수 없었다. 대위가 몰래 고무를 빼돌린 것인데, 그 사실은 대위와 간류, 성기구 장인만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맥아더 원수가 다녀간 후 '아카센'은 '보스가 다녀간 섹스 숍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주둔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콘돔이었는데, 당시 콘돔은 조잡한 제품이 많아 연자방아 같은 큰 나무 틀에 물건을 일일이 끼워 넣어 핀홀이 없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참고로 핀홀은 콘돔의 작은 구멍을 말하는데, 이 구멍이 있으면 피임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당시 요코하마에는 미 본토에서 도쿄 근교 기지에 근무하는 군인 가족들이 연습함을 타고 정기적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 사이에서 '기저귀 함대'라고 불렸는데, 이 함대가 오면 '아카센'의 콘돔 매출이 껑충 뛰었다. 그러나 맥아더 이슈가 있은 후부터는 매출이 급상승한 것이 아니라, 가게 앞에는 언제나 300미터 이상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받은 돈도 금고에 보관할 여유가 없어 가게 뒤편 네모반듯한 방에 그냥 두었다고 한다. 한번은 가게를 마치고 지친 간류가 달러 지폐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맥아더 방문의 여파는 또 하나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2차 세계대전을 끝낸 남자'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그가 섹스 숍에 간 것은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었다. 간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나라에서 아카센 취재에 오지 않은 것은 소련과 중국 기자들뿐"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 "내 것과 같은 크기의 성기구를 만들어줘“

 그 결과, 콘돔과 성기구 주문이 쇄도했다. '아카프네 · 재팬'이라고만 써서 보내면 제대로 도착했다. 외국에서 온 편지는 한 달에 100통은 족히 넘었다. 그 중에는 돈이 동봉된 것, 돈이 들어있는 것, 들어있어도 부족한 것 등 다양했지만, 돈이 들어있는 것에 대해서는 설령 부족하더라도 제대로 물건을 보냈다고 한다. 전후 혼란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보내는 것만으로도 귀찮은 작업이었지만, 패전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바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한 달이 지나자 미군 세관 군인들도 협조해 주었다고 한다.

'아카센'에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B4용지 크기의 도화지에 성기 그림을 그리며 "내 발기된 성기다. 이것과 같은 크기의 성기구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 안에는 도화지가 가득 차서 끝이 튀어나온 것도 있었다. 크기는 대략 30cm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아내나 연인이 있는 병사나 오직 일본여성을 둔 병사(GI) 등은 '내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가 나를 기다려줄까,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성기와 같은 크기의 모양을 만들어 외로울 때 이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사용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주문한 성기구를 가지러 오지 않는 이유

 게다가 3일 후, 4일 후까지 달라고 엄청나게 조바심을 냈는데 3달, 4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런 장식품이 너무 쌓여서 간류의 화선지 옆에 적힌 이름을 토대로 아는 장교에게 알아보니 주문한 지 이틀, 사흘 후에 출동 명령을 받고 그대로 전사한 병사(GI)들이 많았다고 한다. 설마 전사한 GI의 영정사진을 부인에게 전달할 수는 없으니 스님에게 부탁해 화선지와 함께 공양하고 불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들은 기독교인일 테니 처음에는 교회에 부탁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와 위패 공양은 어울리지 않는다. 죽은 자의 공양에 불교도 기독교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다시 생각해서 스님에게 부탁한 것이다.

 다만 거대한 페니스가 그려진 도화지가 '아카후네'에는 지금도 10장 정도 남아 있다. 1963년 가즈오(和夫)가 가게를 이어받아 정리하던 중 벽장에서 나온 것이다. 아카후네의 역사를 말하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버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이 가게를 물려받은 후 정리하던 중 장롱에서 나온 것이다. '아카센'의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아들 가즈오에게도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아카센'이라는 성기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군으로부터 그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가즈오 씨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자전거를 타고 납품하러 갔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라디오만한 크기의 상자에 담아 운반했기 때문에 몇 개를 납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주문이 몇 개였는가 보다 가즈오에게는 군에서 '아카센' 주문이 들어온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는 아버지 간류와 군의관 대위, 그리고 성기구 장인들만의 비밀이었던 '아카센'을 미군은 당당하게 부상병에 대한 치료의 일부로 여겼던 것이다.

▦ 文春온라인 2021.9.29

● 성픙속 50년 (단행본)
2020년 2월 29일 발매
쓰쿠바서방(筑摩書房)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한일갈등타파연대

대표이메일 : [email protected]
Copyright © 한일갈등타파연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