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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사도광산 조선인노동자 / 広瀬 貞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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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2-0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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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조선인노동자 (1939~1945)


히로세 테이조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과)

 

주로 전쟁 시기 사도 광산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과 생활 실태를 밝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도 광산을 처음 방문한 조선인은 조선 정부가 광업 근대화를 위해 파견한 o명의 유학생이었다. 그들은 궁내부 궁료국 사도광산학교에서 광산학을 배웠다. 이후 1910년대부터 조선인 노동자들이 사도광산에 취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방 제도'(방장 제도)에 따라 방장의 엄격한 통제 하에 '타국인족(他國人足)', '타국광부(他國坑夫)'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일본의 전시체제가 진행됨에 따라 미쓰비시광업소 사도광업소는 금 생산, 더 나아가 동 생산 증산에 매진했다. 이러한 증산 체제를 위해 조선인 남성이 전시 동원되었다. 19392월부터 19457월까지 '모집', '노동협회 알선', '징용' 형식으로 1200명이 사도광산에 보내졌다. 이 중1000명이 '모집' 형식이었고, 이들의 출신지역은 주로 충청남도가 주를 이루다가 패전이 가까워지자 전라북도까지 확대되었다. 

 

셋째, 조선인 노동자들은 주로 '운반부', '암반부', '지주부'로서 가혹한 갱내 노동을 일했다. 이 때문에 1o명 이상의 사망자, 36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2건의 쟁의가 발생하여 19436월까지 도주자는 150명 이상이었으며, 이후에도 사도광산에서 도주자가 잇따랐다.

 

넷째, 사도광업소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택과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근무 중 8명의 조선인이 징병되어 전장으로 보내졌다. 조선인의 노동과 생활은 미쓰비시광업의 노사협조 기관인 협화회, 반관반민 광산통제회, 특고경찰이 중심이 된 니가타현 협화회 아이카와 지회에 의해 3중으로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다.

 

다섯째, 패전 후 사도광업소의 조선인은 타현에서 귀환한 부대를 포함해 570에 달했다. 그들은 194510월부터 12월까지 니가타항에서 귀국했다.

 

앞으로는 1910~1920년대 조선인 노동자의 실태를 밝히고, 나아가 사도광산 역사 속에서 전시기 조선인 노동자의 역할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결론부 옮김)


#히로세_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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