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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위안소 추진한 오카무라 대장 “위안부단은 병참의 일 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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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0-12-2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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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 군인들의 성욕 관리에 실패해 전력(戰力)이 크게 약화된 예로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1918)을 들 수 있다. 당시 출병에서 일본군은 병력 7개 사단 중 1개 사단 정도의 군인들이 성병(현지 강간 등 원인으로)에 걸려 거의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참조: 김정면 정신대1992)

 

이러한 경험을 지닌 일본군에서 기존의 민간업자가 군대 주둔지에 장병을 상대로 한 점포를 위안소로 본격 추진하게 된 것은 상하이사변 이후이다.

물론 동기는 점령지에서 빈발한 중국인 여성에 대한 일본군인들의 강간 사건으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점 장병이 성병에 걸려 병력이 저하되는 점 중국인 여성과의 접촉으로 군의 기밀이 새나가는 것도 두려워한 점 등이었다.

 

일본 육군에서 위안소 추진한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은 위안부단을 병참의 일 분대로 간주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예전의 전쟁 시대에는 위안부 등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안 창설자이다. 쇼와 7(1932) 상하이 사변 때 두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하였기에 파견군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같은 지역 해군을 본떠, 나가사키현(長崎県) 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렀고, 그 후 전혀 강간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다.

현재 각 병단은 거의 모두 위안부단을 수행하여 병참의 일 분대가 된 형태다. 6사단 같은 부대는 위안부단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강간죄가 끊이지 않는 상태이다.“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 자료 제1 전장 회상편” 1970, 302~303)

 

2차 세계대전 같은 전범국가인 독일의 경우 발터 폰 브라우히치 독일 국방군 육군 최고사령관 또한 독일군의 현지 여성들에 대한 강간 등으로 인한 전력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젊은 군인의 (매춘업소) 주간 방문은 그들 사이의 성적 과잉을 방지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간주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군이 나서서 점령지 위안소를 만들어 관리(위안소는 보통 업자가 경영관리하고 있었으나, 군은 여러 면에서 위안소의 존립과 가동에 관여)했고, 독일군은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매춘업소를 이용했다.

 

위안소(매춘업소)/위안부(성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두 국가의 차이점으로 인해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과 화해치유재단 등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한 반면, 독일은 이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참고자료: 아시아여성기금, German military brothels in World War II (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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