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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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0-12-27 18:14본문
[팩트체크]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만주사변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본격적으로 운영된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7월 이후부터지만, 직접적인 기원은 6년 전인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그해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는데 자료에는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요정은 오래 전부터 장교들의 잠재적인 위안소로 되어 있었는데, 작전도, 모략 회의도, 상사와의 모의 밀담도 모두 요정 안방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대련, 여순, 봉천, 장춘, 모란강을 비롯한 주요지역에서는 요정이라는 이름의 장교들 위안소가 일찍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 만주국 설립이라는 만주 점령이 장기적인 야망이고 보면, 관동군 부대는 무기한의 수비상태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므로 일반 병사의 섹스 처리문제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동안 그냥 내버려둔다면 무슨 일이 폭발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일본 군대의 현지에서의 강간, 강탈 행위는 더욱 빈번해졌으며, 성병 만연 역시 더욱 심해져갔다. 이러한 점에서도 관동군의 상층부는 군대 주변의 떼지은 매춘업자와 요리점을 묵인 또는 암암리에 환영한 낌새가 보였다.
이 때문에 관동군과 그 주변에 널려 있는 매춘업자, 그리고 용달사간에 묵계가 이루어진 것 같다. 이것은 묵계로 하여 암암리에 협정 비슷한 불문율의 약속이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즉 군대 주변의 매춘업을 허가 또는 감찰한 형태였던 것이다.
만주사변 이래 관동군이 그 주변의 매춘옥(賣春屋)을 맞아들인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 병사의 현지강간** -> 성병만연 -> 병력감소를 막기 위한 타산 때문이었다."
(김정면 著『정신대』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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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 사건(柳条沟事件)은 일본 제국의 관동군이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 (위키)
**1918년 8월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의 러시아여성에 대한 강간사건이 빈발해 성병이 만연했다. 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과 37년 노구교사건 때도 일본군병사의 강간사건이 현지주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외무부, 일제 때 위안부실태 조사 보고서)
(위 사진= 선양에 입성하는 일본 제국 관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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