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2007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까지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1-11-27 17:18본문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2007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까지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포커스 2019 가을.168호)
한국 정부는 지난 6월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공동기금을 조성하는 ‘1+1’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렇지만 대법원판결을 살펴보면, 한국기업이 공동기금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한국기업의 참여를 제안했을까? 이는 한국 측도 피해자 배상 판결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일까? 이 문제를 숙고해 보면, 대법원판결과 청와대의 ‘1+1’ 제안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1+1 제안을 내놓은 데에는 한일청구권협정을 둘러싼 역사적 현실이 작용했다. 그 역사적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민간(개인)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고,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노무현 정부는 이를 어떻게 다시 해석하고 어떤 식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한일교섭
피징용자 보상 문제의 기본 방향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교섭에서 그 틀이 잡혔다. (5·16 군사 쿠데타 직전인 1960년 5월 10일 한일교섭) 이때 한국 측은 보상대상으로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했으며, 이 보상은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질문했고, 한국 측은 “국가로서 청구하며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한국 국내에서 조치하겠다”라고 답변했다. 즉 정부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는) 개인 보상금을 받아서 국내에서 이를 집행하겠다는 기본 틀이 이미 장면 정부 당시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1961년 12월 15일, 즉 5·16 쿠데타 이후 재개된 한일교섭에서 한국 측 수석위원은 태평양전쟁 전후로 일본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노무자가 667,684명, 군인과 군속이 365,000명으로 총 1,032,684명이라고 제시했다. 그중 부상·사망자는 군인·군속 83,000명, 노무자 19,603명이었다. 또 한국 측은 피징용자 중 생존자에 대해서는 1인당 200달러로 총 1.66억 달러, 사망자에 대해 1인당 1,650달러로 총 1.28억 달러를, 부상자 1인당 2,000달러로 총 0.5억 달러, 도합 3.44억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한일 양측은 개별적인 청구권 금액 산정을 통한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1962년 3월 외상 회담을 계기로 한일교섭은 한일 양측이 청구권 금액의 총액을 제시하고 조율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로써 개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퇴색하고, 청구권 자금의 성격은 포괄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하라 비밀회담에서 한국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에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와 ‘민간청구권 보상’
그 후 실제 한일청구권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1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출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까지 국민소득을 배가시키고 이를 위해 청구권 자금을 공평하게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민간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야당이 이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국 1966년 2월에 공포된 법은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라고만 명기했다. 1967년 두 번째로 대선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되면 곧 보상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 1월에 이르러서야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자료 수집을 위한 법률이었고, 보상을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때 신고대상 중에 피징용자와 관련된 것은 △군인·군속·노무자로 소집·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라는 항목이었다.
2018년 12월 20일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 한국유족회> 소송단은 ‘한일청구권 자금, 일본 전범 기업 1천 명 대규모 소송’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일제강점하유족회, 일제강제연행한국생존자협회, 일제강제동원생환자유족회, 대일항쟁기희생자추모회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2005년 '한·일회담문서공개민관공동위원회'에서도 청구권 자금을 피해자 보상금으로 정의했는데도 정부는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이라는 명목으로 일부 피해자에게만 돈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소송단은 1103명의 원고가 1인당 1억 원씩 배상할 것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접수했다고 밝혔다. 한편 유족회는 한일청구권 자금 환수 소송과 별개로 일본기업 70여 곳을 상대로 한 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한일청구권 자금을 청구하는 취지라면,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징용으로 겪은 피해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직접 묻고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별개의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판결을 해석하면 한국 정부가 청구권 자금으로 희생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할 엄밀한 의미의 법적 책임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보상금이 지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신고 기간이 너무 짧았고 확실한 증거서류를 구비한 신고만 접수했다. 또한 이 기간에 지급 청구를 하지 않은 경우, 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 인명관계 신고수리가 8,910명이었는데, 한일교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망자를 77,603명으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적은 수치였다. 보상 액수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컸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떤 이유든 간에 박정희 정부가 피해실태를 철저히 조사할 의사나, 보상할 의사가 크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종합하면, 무상 3억 달러에 해당하는 1,097억 원에서 경제개발에 913.5억 원(89.4%), 피해자 보상으로 104억 원(9.7%), 독립유공자 기금으로 20억 원(1.9%)이 집행되었다. 피해자 보상은 대부분 개인재산권 보상이었고, 피징용 사망자 8,552명에 대한 25억 원은 전체 자금의 1.8%에 해당했다.
관련링크
- 이전글[사회진보연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2007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까지 (2) 21.11.27
- 다음글[활동가 르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혹은 반일정치홍보관 21.11.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