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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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1-03-30 04:17본문
2015년 4월 2일, 일본의 유력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은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위안소를 설치했으며 베트남인 위안부를 모집하여 한국군 사병을 상대로 매매춘을 시키고 있었다는 내용을 게제했다. 이 내용은 일본 방송사인 TBS 워싱턴 지국장인 야마자키 노리유키(山口敬之) 씨의 취재 결과 밝혀진 것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로 시종일관 일본을 비난하고 있는 한국이 실은 베트남에 위안소를 설치하며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다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이중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간문춘]의 기사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여기에 올려 놓는다.
<한국군은 스스로 ‘터키탕’이라고 불리는 한국군 전용 위안소를 설치하며 베트남 여성에게 매매춘을 시키고 있었다>
저는 미국에서 ‘터키탕의 실태’나 이 시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물이 있는지 다시 한번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당시의 미군관계자와 베트남계 미국인으로 초점을 맞추어 미국 내의 베트남 관련 네트워크를 찾았다. 관련이 있는 포럼에 참석하거나 미국 정부의 퇴역군인부의 데이터베이스로 조사해 연락처가 밝혀진 관계자에게 이 잡듯이 편지나 이 메일을 보냈다. 또 사이공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증언을 듣기 위해 워싱턴 교외 버지니아주의 베트남인 주거 지구의 신문에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광고를 냈다. 그러자 곧 광고를 본 미국인으로부터 이메일이 날라왔다.
Hans Ekes 씨(70). 60년대 후반에 미국의 통신 설비 회사에서 사이공에 파견되어 그 후 몇 년간에 걸쳐 베트남과 미국을 왕복했다고 한다Ekes 씨는 지금은 버지니아주 동부에서 연금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젊은 나이로 체류한 사이공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당시의 거리 분위기를 오랜 시간에 걸쳐 말해 주었다. 터키탕에 대해 질문했더니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터키탕’은 당시 사이공에 있었던 사람의 사이에는 ‘사정 팔러’(Steam and Cream Parlor)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젊은 베트남인 여성으로부터 성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터키탕의 실태에 대해서는 서서히 밝혀졌지만, 한국군 위안소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인물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조사 작업을 계속해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베트남 전쟁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퇴역 군인으로부터 이메일이 날라왔다.
그 인물은 Andrew Finlayson 씨(71). 미 해군 해병대의 보병 부대장으로 67년에서 2년 8개월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서 싸웠고, 사이공을 비롯해 남 베트남 각지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퇴역 후에는 분쟁 지역의 군사 고문단으로서 활약했으며 베트남 전쟁에 관한 서적도 펴낸 적이 있는 연구자이다. 인터뷰를 신청했더니 쾌의 승락을 해 주었다.
“한국군의 위안소는 확실히 사이공에 있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남베트남 각지의 농촌 정찰 부대의 책임자로 한국군과의 연락 조정 업무에 종사한 경험이 있어서, 한국군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미군 사령관이 지적하고 있는 한국의 위안소는 한국군의 병사에게 봉사하기 위한 큰 매춘 시설입니다. 한국 병사에게 성행위를 제공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Finlayson 씨에 따르면 이 시설은 ‘터키탕’으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한다. 그 후 취재 결과 이 시설의 건물이 아직도 현지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시설이 인접하는 두 빌딩을 합쳐서 하나의 업소로 운용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Finlayson에 따르면 사이공 시내의 다른 장소에는 이것보다 더 큰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시설은 내부가 많은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1구획에 20명 정도의 베트남인 여성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군은 왜 사이공 시내에 대규모 위안소를 만들어야 했는가? Finlayson 씨는 바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한국군은 병사들이 베트남 여성들을 겁탈하거나 개별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한국인 장교가 농촌 여성을 매춘부로 삼을 우려도 있었고 이러한 행위는 베트남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국 내부에서는 성병 예방도 큰 현안이었습니다. 위안소라면 위안부의 건강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에서는 성병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고 특히 매독이 만연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정한 기간 동안 전선에서 싸운 한국군 병사는 “휴식과 회복 기간(Rest & Recuperation)”으로 전쟁터를 떠나서 사이공에서 휴식하는 것을 허가 받았습니다. 이 휴식중인 한국군 병사들이 사이공이나 근교 농촌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한국군이 병사들을 위해 위안소를 사이공 시내에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면 한국군 병사를 상대한 베트남인 위안부는 어떤 여성들이었는가?
Finlayson 씨는 그 대부분은 베트남 각지에서 온 농촌 출신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매춘 시설에서 일하던 여성은 거의 예외 없이 농촌 출신의 아주 어린 소녀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이 위안소에 온 이유는 다양합니다. 빈곤 때문에 가족에 의해 시설에 팔린 소녀도 있었고 스스로의 의사로 온 여성도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직업을 잃고 위안부가 되었는데 당연히 속아서 끌려온 여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의 서한에는 이 시설은 한국군 전용 위안소로 설립되었으나 미군 등 동맹군 군인들도 예외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그럴 경우에는 38달러가 청구되었다고 적혀 있다. 한국군 위안소가 동맹군의 군인들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에 대해 Finlayson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휴양 기간에 사이공에 체류하는 한국군의 인원수는 시기나 계절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한국군 전용으로 설립된 시설이었는데 한국군의 인원수가 많지 않을 때는 동맹군 군인들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Finlayson 씨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지금까지 읽었던 공문서의 내용이나 관계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완전히 일치했다. Finlayson씨에 대한 한 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 결과 제가 1년 3개월 동안 벌인 이 취재 과정에서 느낀 몇 가지 의문점에 해답을 얻게 되었다. 물론 한국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의 경위, 규모, 운영 실태 등 앞으로 밝혀야 할 부분은 많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사이공에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도시형 위안소”라고 할 수 있는 한국군 시설이 존재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는 없다.
이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Hans Ekes 씨(70)와 Andrew Finlayson 씨(71)의 증언으로 한국군은 당시 사이공 시내에 한국군 전용 위안소를 설치하여 운영했으며 베트남인 여성을 고용해 매춘 행위를 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위안소를 설치한 이유는 한국군 군인이 부녀자 강간을 벌이거나 성병에 감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 출처: ISHIGAMI 다음블로그
한국인이 알아서는 안 될 불편한 진실 -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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