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매춘자료] 수업시간에 위안부-매춘 관계 설명한 류석춘 교수 사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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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2-11-26 01:19본문
[쟁점토론] 2022.11.23. 검찰(서울서부지법)이 2019년 수업 시간에 위안부와 매춘 관계를 설명한 류석춘 당시 연세대 교수에 징역 1년 6개월 구형했다. 이에 위안부에 대한 역사·정치·경제·군사·성담론 등 관련 분야의 팩트를 알아본다.
#위안부 (慰安婦, military prostitutes) (1)
일찌기 주로 전지(戰地)의 시설에서 장병의 성의 상대를 한 여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위안부라고 하면 일본군 위안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에도 존재했다.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일·중 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및 한미 군사 합동 훈련 및 미국군 연합군 및 유엔군 주둔시 등 당시의 전지 훈련지 주둔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 등에서도 존재가 보고됐고, 일본군, 한국군, 미국군 및 유엔군의 군인· 군속에 대해서도 매춘업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위안’이란 "마음을 위로하고 노고를 위로하는 것, 또 그런 일" "평소의 노고를 위로하고 즐기는 것"을 말한다.
1966년의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문에서는 "위안부"를 "일반적으로 일상용어에서 매춘 행위를 하는 여성"으로 정의된다.
■ 군대와 창녀
16세기에는 스페인군이 네덜란드 침공했을 때 매춘부가 1,200명 수행했다고 하고, 또 독일에서 1598년에 간행된 군사교과서에서는 수행 매춘부의 역할에 대해 논의되고 있다.
십자군 원정에도 매춘부가 동행하고 있었다. 매춘부 부대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 조선시대 이전의 한반도에 있어 외국 사신이나 고위 관리의 환대와 궁중 내의 연회 등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성적 봉사 등을 위해 준비된 노비 신분의 여성을 의미했다. 기생은 국경 수비 장병의 위안부로 활용되었으며, 국경 6개소의 진이나 여진족이 출몰하는 백두산 부근의 읍에 파견되었다. 조선의 기생은 갑오개혁으로 법적 폐지되었으나, 민간의 사창 숙소(기생집 등)의 호칭으로 현재에 이른다.
일본에도 오래 전부터 창녀(郎陣女郎)가 있었다.
조지 힉스는 로마제국이 포로 여성을 성 노예로 삼아 "일본군과 같은 위안제도"를 채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군대의 이용을 목적으로 설치된 매춘부에 대해서는 「군용 매춘부」 참조.(*별도 게시 예정)
■ 근대 공창제와 군대
자세한 것은 「근대 공창제」 참조
후지메 유키는 근대형의 공창제와 군대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국가에 의한 관리 매춘을 공창제도라는 위안부·위안소도 공창제의 일종으로서 연구되고 있다
전 근대의 공창에 대해서는 「공창」 참조. (*별도 게시 예정) [J위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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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인간에게 있어 성교라는 행위가 생존 상 필요불가결한 것이듯, 군대 또한 마찬가지. 말과 전차가 필요한 것처럼 위안부도 군수품으로 간주되곤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18세기 미국독립전쟁까지 서양 원정군에게는 반드시 소녀대(파견 위안부)가 1개 연대를 이루며 군인들과 동행했다. 목적은 병사들을 성적으로 위로하는 것, 그리고 병사들의 시중이나 막사 청소, 세탁 등이었다.
또 위안부들이 동행함으로써 병사들이 다른 나라 여자들을 강간하거나, 또 그로 인해 성병에 감염되거나, 사생아를 증가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나아가서는 병사들의 남색(동성애)을 막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여자가 있는 것은 병사의 사기를 높이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위안부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급료를 받는 용병이었다.
「알바공(公)」의 군대는 네덜란드 원정 도중 400명의 고급 창부들이 말을 타고 하급 위안부 800명이 도보로 후방에 연대를 이루어 뒤따랐다.
1298년 「아프레히트왕」이 스트라스브르그에 입성했을 때 800여 명의 위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343년 독일 사단장 「울스링거 베르나」는 3500명으로 구성된 군대에 1000명의 위안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위안부들이 섹스를 할 때는 상대가 장교, 사병을 불문하고 화대를 받았다. 화대를 지불하지 않는 병사들은 창이나 검을 돈 대신 잡혔다.
위안부들 중에는 검 10자루를 골프백 같은 것에 넣어 허리에 메고 다니기도 하고, 창을 4~5개를 한데 묶어 어깨에 메고 있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위안부 연대는 시끄러웠다.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도망치기도 하고, 혹은 손님을 서로 받으려고 싸우는 등 항상 조용한 적이 없었다.
[복전화언 지음 『역사로 보는 세계의 성풍속』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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