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임진왜란 피로인(被虜人) 쇄환외교 / 정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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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10-13 08:45본문
임진왜란 피로인(被虜人) 쇄환외교*
재일조선인 문제 및 한반도 내 포로문제에 관한 함의를 중심으로
1. 서론
역사문제에 관한 한국과 일본 간 인식 차이는 좀처럼 좁히기 어렵다. 1965년 국교 정상화를 거쳤지만, 과거사에 관한 양국 공동의 역사 인식을 마련하지 못했다(양기웅, 2014). 양국은 정치, 안보, 경제, 사회문화 등의 영역에 대해서는 선린 우호의 협력적인 관계를 보이는 한편, 역사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 갈등과 대립의 측면을 보인다(이원덕, 2005; 김동노, 2016; 조양현, 2019). 지리적으로 밀접한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상호작용을 전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을 겪었으며, 임진왜란을 통해 다양한 인명피해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본 연구는 임진왜란 중 발생한 전쟁포로, 즉 조선피로인 문제에 주목한다. 특히, 피로인들의 쇄환에 영향을 미친 제약 요인을 논의한다. 기존 연구는 쇄환외교1)에 작용한 장애요인을 외교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다(손승철, 2006; 요네타니 히토시, 2007; 김정호, 2016). 그러나 본 연구는 쇄환 과정에서 작용한 장애요인을 개인적 차원, 그중에서도 자의적, 타의적 요인을 논의한다. 이를 통해 쇄환외교에서의 제약 요인을 고찰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본 연구는 조선피로인 문제에 나타난 쇄환외교에 초점을 맞추어, 쇄환외교의 특성을 현재의 외교관계에 적용, 함의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반도에는 조선피로인 문제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쟁포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한반도 내 포로문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재일조선인 문제가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한반도 내 포로문제 논의에서 나타난 개인적 요인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포로 송환 등의 과정에서 실질적인 당사자의 의사가 어떠하였고, 이러한 개인적 의사가 송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개인적 요인을 중심으로 한반도 내에서 발생한 다양한 포로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유효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 연구는 문헌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해사록(海槎錄)을 주요 연구범위로 설정하였고, 조선피로인 및 재일조선인에 관한 기존 연구 및 관련 문헌을 함께 살펴보며 연구를 진행하였다. 해사록은 해행총재(海行摠載)에 실린 견문록이며, 조선시대 당시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임진왜란 이후의 최초의 공식적인 사행 기록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문신 경섬은 8개월간의 일정을 일기 형태로 해사록을 기록했으며, 그 외에도 선조, 예조 참의 등에 보내는 서신을 비롯한 다양한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피로인의 쇄환과 재일조선인의 북송은 모두 개인적 요인이 개입되어 있는 의제다. 두 의제의 비교를 통해 재일조선인 문제에의 함의를 도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반도 내 포로문제에 발전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조선피로인과 재일조선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다른 차별성을 띠며 향후 한반도 내 포로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한다.
2. 이론적 배경
2.1 선행연구 분석
쇄환은 임진왜란 이후 한일관계 논의에 있어 주요 연구주제로 다루어졌다. 특히, 회답 겸 쇄환사 파견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손승철(2006)은 회답 겸 쇄환사의 파견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시대 한일관계를 조망하였으며, 김정호(2016)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 이루어졌던 쇄환교섭을 비교 분석하여 정치외교사적 특성을 도출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피로인 쇄환외교 전략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일본어 역관의 역할을 논의하며 피로인 쇄환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거나(김정호, 2008a), 사료를 통해 쇄환교섭의 전개 과정을 분석하며 임진왜란 시기 쇄환이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김정호, 2008b). 이러한 선행연구는 쇄환외교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이루어졌던 한일관계를 논의하고 있다. 특히, 조선의 사신 파견과 피로인 쇄환을 통해 양국 외교관계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쇄환 과정에서의 제약 논의를 활발히 다루지 않았고, 쇄환 자체에 초점을 맞추거나 시기별 논의를 통해 비교분석을 진행하였다.
본 연구는 기존의 거시적이고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되었던 쇄환과정을 개인적 차원에서 논의함으로써 새로운 연구기반의 형성에 기여하고자 한다. 쇄환과정 연구에 있어 기존과 다른 접근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선행연구와 차별성이 있다. 또한, 본 연구는 조선피로인과 재일조선인을 종합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의 차이점이 부각된다. 조선피로인과 재일조선인은 본질적으로 전쟁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포로의 성격을 띤다. 본 연구는 조선피로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함과 동시에 피로인 쇄환의 특성을 재일조선인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재일조선인 문제에의 함의를 도출하고 나아가 한반도 내 포로 문제에 관한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본 연구는 선행연구와 다른 접근방법을 채택하여 현재 의제에 관해서도 적용 가능하며 시사점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크다.
2.2 연구흐름도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흐름을 통해 진행한다. 우선 해사록과 해행총재를 비롯하여 조선피로인에 관한 기존 연구 및 관련 문헌에 관한 질적연구를 시행하여 조선피로인 쇄환과정에서의 특성을 살펴본다. 특히, 조선피로인 쇄환에서 작용한 개인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한다. 이후, 개인적 요인의 관점에서 재일조선인 문제와의 비교 및 적용하는 단계를 거친다. 조선피로인과 재일조선인 모두 본국으로의 송환 과정에서 당사자 개인의 의사가 표출되었으며, 이를 통해 포로문제 논의에서의 개인적 요인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향후 한반도 내 포로문제에 관한 발전 방향을 제언한다. 현재 한반도에는 납북자, 비전향장기수 등 포로 및 납치 문제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본 연구는 개인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피로인 쇄환과 재일조선인 북송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기존의 역사적 경험은 개인적 요인이 어떻게 작용되었는지를 보여주며, 향후 한반도 내 포로 및 납치 문제의 시사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 내 납북자 및 비전향장기수 문제의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기존 한계를 극복하여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을 전달하고자 한다.
3. 임진왜란 시기 조선피로인 문제
3.1 해사록에 나타난 조선피로인 쇄환과정
해사록은 일본의 요청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처음 진행된 정식 사행의 기록을 담고 있다. 해사록에 참여한 조선시대 문신 경섬의 임무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넘어간 조선피로인을 다시 본국으로 데리고 오는 쇄환이었다. 해사록의 기록은 쇄환을 위한 경섬 일행의 전개 과정과 그 노력을 담고 있다.
해사록에 기록된 주요 일정은 다음과 같다. 경섬 일행은 1607년 1월 한양에서 출발하여 같은 해 2월 부산에서 출항하였다. 1607년 3월 쓰시마에 도착, 4월에는 오사카와 교토를 지나 1607년 5월 24일 에도(도쿄)에 입성하였다. 경섬 일행은 당시에도 막부의 우두머리 격인 쇼군을 만나 국서를 전달할 예정이었다. 국서에는 조선 피로인 문제 해결을 위한 쇄환 논의가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고, 해사록에도 회답 겸 쇄환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해사록에 나타난 쇄환 과정은 임시적인 성격이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 이루어진 공식 사행인 만큼, 일본의 정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시 에도 막부의 진의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해사록에는 피로인들의 쇄환과정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 역시 포괄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대일본 인식이 어떤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포착하고 있기도 하다. 사행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대해 ‘교활한 왜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특성을 탐욕과 사나움 등 부정적 표현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왜란 이후의 조선과 일본의 갈등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외에도 해사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나타내는 ‘귀무덤’, ‘임진년 난리’ 등이 언급되며, 임진왜란에 관한 조선인들의 비극적 인식을 나타낸다.
해사록을 통해 조선피로인 쇄환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 차이 역시 확인해볼 수 있다. 조선의 경우, 조선피로인 쇄환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과의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의제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즉, 일본과의 국교회복의 선행조건으로써 피로인 쇄환을 제시한 것이다(김정호, 2008a; 김정호, 2008b). 조선은 피로인 전원 쇄환을 목적으로 설정하며 임진왜란 이후 발생한 전쟁 포로의 본국 송환에 중점을 두었다.
“이제 두 나라가 새로 화친을 맺으려고 하는 이때에, 사로잡힌 남녀들을 모두 돌려주지 않으면, 귀국이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할지라도 그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습니까? 이야말로 각하가 주선하여 힘쓸 시기입니다. 만일 속히 영을 내려 즉시 쇄환하되, 한 사람의 남녀도 그대로 남겨 두지 않게 하여, 피차의 민생들로 하여금 각자 안정하게 살도록 한다면, 두 나라의 교제가 만세토록 길이 힘입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각하께서 힘써 도모하기 바랍니다.2)”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피로인 쇄환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과 대마도의 무역 관계에 초점을 두어, 대조선 관계 회복을 통해 외교 및 무역 이익을 증대하고자 했다. 한편, 일본은 조선 피로인 쇄환에 관해 ‘피로인 자신의 의사에 따른다.’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으로 인해 조선 피로인 쇄환 과정에서는 조선의 의지대로 전원 송환이 어려워졌으며, 쇄환에 있어서 개인적 요인이 주요 요인으로 대두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표1>] 조선피로인 쇄환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
조선피로인 쇄환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
3.2 쇄환외교의 한계
조선피로인 쇄환외교에는 다양한 제약요인이 작용하였다. 우선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개인적 요인이 작용하여 쇄환에 관한 거부가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 관계, 조선 내부의 정치적 상황 등이 쇄환외교의 한계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대외관계에 내재된 서로에 대한 불신과 양면성은 쇄환외교 전개의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피로인의 전원 쇄환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쇄환외교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신뢰를 충분히 쌓을 수 없었고 사행에 참여한 경섬 일행은 지속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일본의 경우, 쇄환 외교에 있어 협력적인 자세를 취한 듯했지만, 실질적인 교섭 전개에 있어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며 양면성을 나타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쇄환외교에서의 한계는 피로인 당사자들의 개인적 요인은 물론,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관계에 따른 대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우선 조선피로인들은 쇄환 거부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조선피로인들의 일본에서의 삶과 연계하여 논의할 수 있다. 피로인들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넘어간 전쟁 포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일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노예가 된 조선피로인의 쇄환을 위해서는 일본인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피로인 쇄환에 있어 당사자 의사를 존중하는 원칙을 설정했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성립된 노예 관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외에도 일본에 위치한 조신피로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피로인들의 구체적인 소재지를 확인할 수 없었고, 소재지 파악과 피로인들의 귀국 의사를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적 제약이 존재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이 조선인 노예의 쇄환을 막기 위해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피로인들은 일본에서의 삶을 편히 느끼며 돌아오려 하지 않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과 일본의 쇄환외교에는 임진왜란으로 기인하는 다양한 정치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 우선, 일본의 쇄환 과정 및 의지에 관한 조선의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쟁포로가 된 피로인들을 다시 조선으로 쇄환하려는 선조 및 조선 조정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피로인의 쇄환을 국교회복의 선행조건으로 내세우면서, 한일 외교의 우선순위로 설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양국의 불신은 쇄환교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다. 해사록에서는 지속적으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쇄환의지를 의심하고 있다는 조선의 인식 역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쇄환외교의 성과는 전체 송환이라는 조선 조정의 의지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1,418명을 쇄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전체 피로인과 비교해 매우 적은 수치였다.3)
“되돌아오는 포로를 점검해 보았더니 남녀 합쳐 겨우 1천 4백 18명이었다. 이어 10일 양식을 내주었다. 대개 포로인으로 일본 내지(內地)에 흩어져 있는 자가 몇만이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돌아가게 하라는 관백의 명령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주인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숨겨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였고, 또 포로인들도 머물러 사는 것을 편히 여겨 돌아오려는 자가 적었다. 지금 쇄환해 오는 수는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 뽑은 정도도 못 되니, 통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4)”
해사록 이후 기록된 해행총재에서도 쇄환외교의 한계가 드러나 있다. 해사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일본 관리의 협조적 모습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쇄환교섭에 관한 일본의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고 있었으며, 이는 일본에 대한 조선 통신사들의 불신 강화로 이어졌다. 이 외에도 조선 정부가 취한 피로인들의 귀국 이후 조치는 지속 가능한 쇄환교섭 구축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 정부가 귀국한 피로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과 관련 조치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열흘분의 식량을 주었다는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의 삶을 모두 내려놓고 돌아온 피로인들을 위한 장기적인 정책과 관련 제도적 기반은 구축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피로인들의 고향에 돌아가 다시 삶의 터전을 만들고 정착할 수 있는 지원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당시 조선 내부적으로도 피로인들을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쇄환외교의 한계는 조선 피로인의 개인적 요인과 일본과 조선 양국 외교 관계의 외부적요인, 그리고 조선 정부 차원의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은 지속적으로 쇄환에 관한 의지를 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하였다. 특히 조선피로인의 개인적 요인은 쇄환외교 전개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3.3 피로인 쇄환과 개인적 요인
해사록에는 피로인들의 기록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피로인 당사자들이 조선으로의 쇄환은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피로인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본국으로 귀국하는 통신사 행렬을 바라보며 조선 출신 여인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 있다. 한일 양국의 외교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피로인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전달할 것이다. 그러나 피로인 쇄환과정에서 드러난 개인적 요인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며 쇄환의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에 있는 조선피로인들은 조선으로의 쇄환을 희망하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일본에 거주하며 개인의 의사가 억압받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피로인은 일본에서의 노예 생활로 인해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고, 일본 사람과 결혼을 한 조선피로인의 경우 쇄환을 위한 배우자의 허락이 필요하였다. 특히, 일본 지방관들은 조선피로인들을 숨겨 놓아 피로인들의 소재 파악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일부 다이묘5)는 피로인들의 본국 송환에 기여하며 수십 명씩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대부분의 피로인들이 노예의 상태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사행록에는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발견된 다양한 제약 요인들이 나타나 있다. 특히 피로인들은 일본인들의 감시와 억류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쇄환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일회적인 사행을 통해 피로인 전원 송환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 역시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행록을 통해 다양한 제약 요인을 피해 귀국행렬의 합류하는 피로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피로인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며 쇄환을 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1607년의 회답 겸 쇄환사는 다양한 제약요인 속에서 총 1,418명을 쇄환시켰다. 해사록에서는 이러한 수치에 대해 “지금 쇄환해 오는 수는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 뽑은 정도도 못 된다.”고 말하며, 조선피로인 쇄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으로 넘어간 피로인에 비해 실질적으로 조선에 돌아온 피로인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쇄환의 거부 요인의 관점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쇄환 과정에서 나타난 제약요인은 피로인 쇄환에 관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입장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피로인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입장 차이가 나타났으며, 일본은 쇄환을 위한 원칙을 세우며 조선의 의지에 따른 쇄환을 제한하였다.
이 외에도 개인적 차원에서 조선피로인 쇄환은 한계를 직면하였다. 일본으로 넘어간 피로인 중 일부는 일본 궁중에서 역할을 맡고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잡았다. 즉, 삶의 기반이 바뀜에 따라 자의적으로 조선의 쇄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반면, 조선으로의 쇄환을 희망하였지만 타의적 요인에 의해 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 남편과 결혼한 조선피로인의 경우 배우자의 반대로 인해 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남자 하나가 포구의 갈대밭 속에서 달려 나와 부르짖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오. 돌아가는 배에 태워 주시오.”하므로 배를 멈추어 태워 주었다. 그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 주인이 놓아 보내려 하지 않으므로 도망쳐 와 여기 숨어서 행차를 기다렸다 하니, 그 정상이 가련하다. 또 한 여인은 그 주인에게 울며 호소하였더니, 그 주인이 놓아주므로 곧 몸을 빠져 달려왔다. 그의 남편인 왜인은 나쁜 사람이었다. 칼을 어루만지며 맞서서 놓아주지 않으려 하므로, 귤지정(橘智正)이 접대하는 왜인 우두머리와 함께 만단으로 타이르니, 그가 마지못해 물러갔다.6)”
즉, 쇄환 과정에서 나타난 개인적 요인은 크게 자의적 쇄환 거부와 타의적 쇄환 거부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자의적 거부의 경우,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거나, 이와 다른 요인으로 인해 조선 쇄환에 관한 의지가 없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타의적 거부에 관해서는 피로인 본인이 쇄환을 희망하였지만, 일본인과 결혼 이후 배우자의 쇄환을 거부한 경우가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의 노예 생활과 일본 지방관들의 억류가 주요 타의적 쇄환 거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납치된 조선피로인들의 나이는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으나, 10대 초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연령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남성은 16세, 여성은 22세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보였다(한상우, 2020). 연령이 낮을수록 조선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적었다. 이 외에도 어린 남녀들은 일찍이 납치당하며 고향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 있었다. 일본에서의 편안한 삶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향에 대해 무지하여 일본에 잔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나이 15세 이후에 포로된 자는 본국 향토(鄕土)를 조금 알고 언어도 조금 알아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듯하였으나, 매양 본국의 살기가 어떠한가를 물으며 양쪽에 다리를 걸쳐 거취(去就)를 정하지 못하므로, 친절하게 말해 주고 되풀이해서 간곡하게 타일러도 의혹(疑惑)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 10세 이전에 포로된 사람은 언어와 동작이 바로 하나의 왜인이었는데 특히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으로 사신이 왔다는 것을 듣고 우연히 와서 뵙는 것이고 고국(故國)을 향모(向慕)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고 싶기는 하나 결정하지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사람은 모두 품팔이꾼으로 고생하는 사람이고, 생계(生計)가 조금이라도 넉넉하여 이미 뿌리를 박은 사람은 돌아갈 뜻이 전연 없었다.7)”
*이하 생략, 전문 파일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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