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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타파연대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 이기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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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10-13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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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로잡힌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다. 어찌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638년 <인조실록>의 기자가 비분강개한다.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다.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한다.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 사관은 이다지도 격정을 토로하는가. 그리고 왜 최명길을 그렇게 탄핵하는가. 그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환향녀(還鄕女)의 아픔과 한이 절절이 밴 사연이다.
 

인질로 붙잡혀간 소현세자 부부 등의 숙소였던 심양관. 병자호란으로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붙잡혔으며 이 중 반은 여성들이었다. |경향신문 자료

인질로 붙잡혀간 소현세자 부부 등의 숙소였던 심양관. 병자호란으로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붙잡혔으며 이 중 반은 여성들이었다. |경향신문 자료

■“‘환향녀’와는 살 수 없습니다.” 

1638년 3월11일 신풍 부원군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單子), 즉 진정서를 보낸다.

“제 외아들(장선징)의 처가 청나라 군에 잡혔다가 속환(贖還·몸값을 주고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습니다. 이제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때 마침 그와 반대 입장의 상소도 함께 올라왔다.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의 진정서였다.

“제 딸이 청군에 사로잡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원통해 못살겠습니다.”

누구는 며느리가 이른바 ‘환향녀’이므로 아들과의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진정서를 올리고, 누구는 사위라는 작자가 환향녀가 된 자기 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겠다니 원통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이른바 삼배구고두(세번 절하며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당한채 항복했다, 사진은 삼전도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이른바 삼배구고두(세번 절하며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당한채 항복했다, 사진은 삼전도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예조도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사로잡혀 갔다온 사족의 부녀자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조정의 의논을 거쳐야 피차 난처하지 않을 겁니다.”

공론이 시작됐다. 그러나 좌의정 최명길은 단호한 어조로 ‘이혼 및 재혼 불가론’을 펼쳤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렵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사실 최명길의 주장에는 명백한 근거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똑같은 쟁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이혼 및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조야첨재·朝野僉載>)

이같은 선조의 예에 따라 인조 임금도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었다. 환향녀와의 이혼과 다른 여자와의 재혼을 금한 것이다. 하지만 사대부 집안들은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너도나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한 것이다. 환향녀를 ‘화냥년’이라, 그 여자가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자식’이라 폄훼하면서….
 

■전쟁을 맞이한 남정네들의 행태 

전쟁이 일어나면 물론 전쟁터의 남성들이 많이 희생당한다. 하지만 힘없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패전하는 날이면 여성들은 그야말로 수난의 수레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무능한 임금, 무능한 아비, 무능한 남편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더 했다.

청나라군의 말발굽이 한반도를 짓밟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된다. 청나라는 인조가 혹 강화도로 피신할까봐 전력을 다해 돌진한 것이다. 강화도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해 수많은 사대부 부녀자들이 피신해있었다. 이른바 천혜의 요새인 ‘금성탕지’라던 강화도가 함락되는 경위를 보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인조는 청나라군이 침략하자 영의정 김류의 아들인 판윤 감경징을 강화 검찰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최후의 보루인 강화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건사할 능력이 안되는 인물이었다. 우선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섬으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주로 사대부 가족인 피란민들이 수십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 데도…. 심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는 결국 굴욕적인 항복으로 신하의 예를 차렸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는 결국 굴욕적인 항복으로 신하의 예를 차렸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는 소현세자빈인 강빈 조차도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강빈이 가마 안에서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을까.

그 뿐이 아니었다. 김경징이 독단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자 강화유수 장신은 “난 지휘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명령 받기를 거부했다.

김경징은 강화도가 금성탕지(金城湯池·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 매우 견고한 성을 뜻함)니 함부로 적군이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매일 술만 퍼마시며 주사를 부렸다. 남한산성의 임금도 안중에 없었다. 심지어 피란온 봉림대군이 “술만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충고해도 “대군이 어찌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듣지 않았다.

그러다 강화도가 한번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아비귀환이 됐다.
 

■힘없는 여인들의 최후 

소현세자빈은 자기 목을 찔렀다. 내시들이 급히 세자빈을 잡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다른 사대부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려실기술>에는 강화섬에서 수모를 당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윤선거의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맸다. 겨우 9살이었던 아들은 손으로 옷과 이불을 정돈한 뒤 빈소를 정했다. 꼬마는 사방 구석에 돌을 놓고 숯과 재를 덮은 후 통곡하여 하직한 뒤 계집종의 등에 업혀 나왔다. 이돈오의 아내 김씨는 시어머니와 동서 등과 같이 목을 찔렀다. 김씨가 즉사하고 시어머니와 동서가 피를 흘려 옷에 가득 흐르자 청나라군이 버리고 갔다.

홍명일의 아내 이씨와 시어머니를 비롯, 여성 3명은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신신당부한 뒤 목을 매 죽었다.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 안에 숨어있다가 적병이 불을 질렀는 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유인립의 아내는 적병이 끌고 가려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청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채 넘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사대부 여인네들만 수모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천민의 아내와 첩도 줄줄이 목숨을 끊었다.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리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했다.”(<연려실기술>)
 

■“빨리 죽으라”고 눈을 부릅뜬 남편 

강화 함락의 장본인인 김경징(강화검찰사)은 도망갔지만, 부인(박씨), 며느리, 그리고 다른 일가의 여인들이 모두 자진했다.

김경징의 아내 박씨는 평소 남편에게 “제발 좀 정신을 차리라”고 바른 말을 했다. 하지만 김경징은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며 힐책했다. 그때 박씨는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면 여자라 해서 모면하겠나”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못난 남편과 자식과 견주면 그야말로 올곶은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경질의 아들인 김진표는 그런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 여인들을 다그쳐 자살하게 했다. 그런 뒤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났다.~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인조실록>)

강화도의 관문인 갑곶돈대. 청나라군이 이 돈대를 통해 강화섬에 쳐들어오자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화도의 관문인 갑곶돈대. 청나라군이 이 돈대를 통해 강화섬에 쳐들어오자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화 유수 장신의 어머니도 죽었다. 강을 건널 때 내관이 봉림대군에게 “장신의 어머니가 있는데 어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봉림대군이 한마디 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는데 낸들 어떻게 하냐”고…. 어머니는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강변에서 죽고 말았다. 참으로 한심한 아들이 아닐 수 없다. 훗날 임금(효종)의 자리에 오른 봉림대군의 몰인정도 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정선흥의 아내는 청나라 군사가 접근하자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에게 달려갔다. “영감(회은군)은 네 아버지와 절친하니 나를 살려달라”고…. 그러나 회은군이 난감해했다.

“내가 어쩌겠느냐.”

그러자 남편 정선흥이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게 낫다”고 꾸짖었다. 아내가 칼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은군이 남편 정선홍에게 “빨리 가보라”고 했다. 과연 아내는 죽어 있었다. 모두 <연려실기술>에 있는 이야기다. 사실이라면 천인공노할 짓이다. 청군에게 짓밟힐까 두려워 살려달라는 아내에게 “빨리 죽으라”고 겁박하고, 급기야 죽게 만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청에 끌려간 30만의 여인네들 

이렇게 자의든, 자의반 타의반이든. 타의든 죽음을 선택하거나 강요당한 여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엄청난 수의 여인들이 볼모로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도 그 사이에 끼어있었으니 오죽했으랴. 다산 정약용의 <비어고(備禦考)>는 “청나라로 간 사람은 60만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제비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연미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정묘호란 때 후금과의 형제맹약을 맺은 장소이며, 병자호란 때도 불에 탔다. 강도몽유록의 무대가 된 곳이다.

제비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연미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정묘호란 때 후금과의 형제맹약을 맺은 장소이며, 병자호란 때도 불에 탔다. 강도몽유록의 무대가 된 곳이다.

1637년 1월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행했다. 청나라군은 수많은 포로를 데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군의 철수행렬은 30일이나 이어졌다.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비어고>)
 

■정절을 지킨 여인들 

목불인견의 과정 끝에 청군에게 붙들려 간 여인네들은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청나라 병사들이 어떤 아름다운 처녀를 끌고 가면서 온갖 수단으로 달래고 협박했다. 그러나 처녀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단식으로 항거했다. 결국 처녀는 끌려가던 도중에 굶어죽었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들도 그 정절에 감탄해서 처녀를 묻어주고 떠났다.

또 심양(청나라 수도)에서 어떤 처녀를 두고 몸값을 협상할 때 청나라 사람이 너무 과도한 약수를 요구했다. 그러자 이 처녀는 ‘환향’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좌의정 최명길은 아내(딸)의 속환을 위해 심양을 찾은 남편(친정부모)과의 애절한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며 ‘이혼·재혼 불가론’을 호소했다.

“심양에 속환(몸값을 주고 인질을 돌려받는 것)을 위해 따라간 남편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이 붙들려 간 아내를 보고는 저승에 간 이를 만난 듯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부족해도 부모나 남편은 붙들려 간 아내를 위해 돈을 마련할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혼을 허락해보십시요. 어느 남편이 아내를 위해 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는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못생겼다”고 수모 당한 조선의 여인들 

홍제천. 환향녀들이 이 강을 건너 귀국하면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홍제천. 환향녀들이 이 강을 건너 귀국하면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막힌 일 또 하나.

“예전에 명나라에 바친 여자들은 극히 예쁜 여자들만 뽑아 보냈는데, 지금은 저렇게 못생긴 여자들만 보냈는가? 그리고 24명 보내기로 했는데 10명만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1637년 9월6일,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조선의 사신 백대규를 꾸짖었다. 청 황제는 10명의 여자들을 직접 간택하면서 평양의 장옥, 용강의 영이, 삼화의 업생. 청주의 영춘 등 4명만 황궁에 두었다. 나머지는 여러 제후들의 집에 보냈다.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 보낸 여자들이 못생겼다고 타박했던 모양이다. 무슨 연유에서 이 여성들이 이역만리 청나라에 가야 했을까. 

* 이하 생략, 전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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