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 조선시대 호란(胡亂) 피로인(被擄人)과 두 딜레마 1 / 이상익 (율곡학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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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10-13 07:29본문
조선시대 호란(胡亂) 피로인(被擄人)과 두 딜레마
글쓴이 이상익
*요약
본고에서는 17세기 조선왕조가 직면한 두 딜레마와 그에 대한 대처를 검토했다. 만주족(滿洲族, 淸)의 침공으로 인하여 주회인(走回人) 문제와 환향녀(還鄕女) 문제가 떠올랐는 데, 이 두 문제는 너무나 예외적인 상황이어서 유교 사회의 정치 전반을 규율하는 일반 원칙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주회인’이란 호란의 와중에 淸에 잡혀갔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고 도망쳐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말한다. 淸에서는 조선에 ‘주회인들을 쇄환(刷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주회인을 쇄환한다는 것은 그 자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주회인을 쇄환하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것이었다. 그러나 淸의 요구를 무시하면 가혹하게 보복할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회인 문제는 조선에 매우 난처한 문제였다
환향녀’란 역시 호란의 와중에 淸에 잡혀갔다가 속환된 여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 이 고향에 돌아오자, 주위에서는 이들을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은 여인[失節女]’이라 하여 멸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환향한 여인을 아내(며느리) 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조정에서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환향녀들의 딱한 사정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조정으로서는 쉽게 이혼을 허락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가문의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겠다는 사대부들의 요구를 무시하기 도 어려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환향녀 문제 역시 조선 조정에 매우 난처한 문제였다.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마주할 때 유교윤리는 권도(權道)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준다. 그 러나 권도의 사용은 신중해야만 하며, 권도로서도 정당화되기 어려울 경우 조치는 단순한 권모술수(權謀術數)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권도를 사용하는 과정은 권도를 사 용할 상황인지, 어떤 권도가 가능할지를 둘러싼 열렬한 논쟁의 과정이다. 본고에서는 주 회인 문제와 환향녀 문제에 대하여 조선 조정이 각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어떤 권 도를 제시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를 고찰해 보았다.
*결론부 중에서
이제 환향녀 문제에 대해 정리해보자. 많은 부녀자들이 淸에 잡혀가서 능 욕을 당하고 돌아왔거니와, 그리하여 환향녀들은 대부분 실절녀로 간주되었 다. 유교사회에서 결혼한 여자의 간음은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함은 물론 더 나아가 ‘의절(義絶) 사항’이기도 했다. 문제는 ‘환향녀들의 실절을 여느 간음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환향녀들의 이혼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도 조정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첫째는 ‘이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최명길은 ‘환향녀는 여느 실절녀와 다르며, 예(禮)는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하는 것[隨時異宜]’이라고 설명하면서, ‘임진왜란 때 이혼을 불허한 선례’와 ‘이혼을 허락하면 많은 피로부녀들이 이역의 귀신으로 남게 된다’는 점 등을 들어 이혼불가론을 주장 했고, 인조는 이를 받아들여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째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경여・이성구 등 당시 많은 신하들은 환향녀는 이미 남편과 ‘의리가 끊어졌다’는 점과 ‘사대부의 가풍을 존중해야 함’을 내세워, 그러나 환향녀들은 여느 실절녀와는 달리 ‘안타깝고 원통한 점이 있음’을 고려하여, 변통의 차원에서 ‘다시 결합하든, 이혼을 하든’ 각자의 선택에 맡기자고 주장했고,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 이혼을 허락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혼불가론을 주장한 최명길이나 이혼허용론을 주장한 이경여 등이 모두 환향녀 문제에 대해 ‘변통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명길은 환향녀를 본래 ‘의절 사항과 무관하다’고 보아, 변통을 발휘 하여 ‘다시 합치게[復合] 하자’고 주장했고, 이경여 등은 환향녀를 본래 ‘의절 사항에 해당한다’고 보아, 변통을 발휘하여 ‘이혼 여부를 각자의 선택에 맡기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환향녀에 대한 애초의 인식 자체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변통을 발휘한 결론 역시 크게 달랐다.
인조가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환향녀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이혼불가론[復合論]’을 고수한 것은 ‘호란을 막지 못했던 자신의 책임’을 각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호란을 막지 못한 책임은 ‘인조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 라 ‘당시 조정 신하들 대부분이 함께 해야 할 책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 신하들 대부분은 환향녀들의 처지를 동정하기보다는 사대부의 가풍을 내세웠다. 그들은 최명길의 주장에 대해 극렬하게 반발하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정의 방침에 제대로 따르지도 않았다.
한 세대가 지난 다음,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많은 사대부 집안에서 환향녀를 내친 것에 대해 ‘사대부들이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만 유리한 계책을 세운 것으로서, 결코 사론(士論)이라 할 수 없다’고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옛날 사람들은 아내가 죄가 있으면 바로 내쳤으나, 함께 삼년상을 지냈거나 돌아갈 곳 없는 아내는 비록 죄가 있어도 내치지 않았다. 내치는 것도 의리를 따른 것이고, 내치지 않은 것 또한 의리를 따른 것이다. 그렇다고 옛날 사람이라 해도 어찌 음란하고 악질(惡疾)이 있는 사람과 한 방에서 지냈겠는가? 생각건대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히 주어 은의(恩義)로 어루만져주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대부 가문의 부녀자 가운데는 개가(改嫁)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은 모두 다시 돌아갈 바가 없는 사람이 아닌 경우가 없다. 그런데 오랑캐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부녀자들은, 비록 절개를 잃어 천시(賤視)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음란한 여인에 비하면 그 사정에 차이가 있었다. 속환(贖還)된 후에는 별처(別處)에 머물게 하고 사당 제사를 함께하지 않더라도, 자식들에게는 그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하고 그 부녀자가 죽으면 자식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고 곡(哭)을 하게 하면 거의 옛날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만중은 ‘환향녀들의 딱한 처지’와 ‘사대부의 가풍’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환향녀들을 ‘은의(恩義)로 어루만져주는’ 동시에 ‘옛날의 법도에 어긋나지도 않는’ 제3의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조정의 신료들은 환향녀 문제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었던 것이라 하겠다.
* 전문: 파일 첨부
* 링크: '피로인(被虜人)' 이민족의 침략과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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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호란 피로인과 두 딜레마.pdf (513.3K) 3회 다운로드 | DATE : 2024-10-13 07: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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