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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식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 - 조총련의 日피해역사 연구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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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08-2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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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慶植

박경식(1922127~ 1998212)은 재일 조선인 출신의 재야 역사 연구자이다. 전 조선대학교 교원이었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금봉리에서 태어났다.

 

개요

19293, 부모님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39, 일본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야간)를 졸업하였다. 19429월에는 국민학교 조교로 임명되었다. 19493, 도요대학(東洋大学)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조선 중고등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 교원을 지냈다. 1998, 자전거로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으며, 향년 75세였다.

 

박경식이 수집한 1300개 상자에 달하는 자료는 모두 시가현립대학에 보관되어 있으며, "박경식 문고"로 불리고 있다.

 

주장과 비판

 조선총련의 주류파를 형성한 선각파 그룹에 맞서, 역사 연구를 진행하던 박경식, 강재언, 문학자 김달수 등은 후각파 그룹을 형성했다. 그러나 조선총련 주류파는 박경식 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식민지 시기의 피해에 대한 역사 연구를 압박하였으며, 특히 노동 동원의 조선인 피해 사실을 발굴하는 작업을 억압했다. 소토무라대는 "조선인 강제 연행" 연구가 북조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선총련 소속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이 북조선이나 조선총련의 조직적 방침에 따라 작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박경식이 '모집', '관알선', '징용'"강제 연행"으로 주장하여 한일 기본조약에 반대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산케이 신문은 좌파 일본인과 재일 민족주의자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여 한국과의 외교 문제를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박경식은 쇼가쿠칸小学館일본대백과전서에서 "조선인 강제 연행" 항목의 집필을 담당했다. 이 항목에서 박경식은 "조선총독부의 관공리·경찰관 및 회사 노동 담당자들이 일체가 되어 폭력적으로 각 사업소로 강제 연행했다. 이들은 할당된 동원 인원을 채우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밭일 중이거나, 업무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다리며 강제로 연행하는 등 '노예사냥'과 같은 사례가 많았다. (중략) 수만 명의 여성이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육군 위안부로 강제로 동원되었다"라고 주장했다.

 

 1942년에 일본의 노동과학연구소가 실시한 "반도 노동자의 근로 상황에 관한 조사 보고서"에서, 홋카이도에 있는 한 탄광의 임금 분포에 따르면, 50엔 미만의 임금을 받은 일본인은 17.6%였고, 조선인은 75.0%에 달했다. 이를 근거로 박경식은 "민족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9년 이후의 "모집", 19422월 이후의 "관알선", 19449월 이후의 "징용"이라는 동원의 형태와 상관없이,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동일한 임금 체계가 적용되었다. 이 임금 체계는 숙련도에 따라 급여가 증감하는 구조였으며, 근속 연수와 숙련도에 따라 더 많은 광물이나 석탄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에 급여도 상승했다.

 

따라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낙성대 경제연구소에서도 반일 민족주의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의도적으로 조선인의 대부분이 비숙련 노동자였던 탄광의 임금 자료를 추출해 반일 감정을 선동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조선인의 대부분이 일본인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은 이유는 민족 차별이 아니라 숙련도 차이 때문이며, 실제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숙련도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은 다른 탄광에서는 임금 분포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큰 차이가 없었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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