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반일감정 부추기는 위안부 집단학살론은 왜곡된 추론이다 (영문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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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0-12-10 20:00본문
42차[기자회견문] 반일감정 부추기는 위안부 집단학살론은 왜곡된 추론이다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강성현 교수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 조사 등을 거쳐 공개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군 패전 직전 30명 조선인 ‘위안부’ 피해 여성들 집단 학살에 대한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의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G-3 작전일지(미중연합군 보고서) 9월 14일 보고서의 한국인 위안부 30명 사살설은 전언형식의 소문을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일 뿐이다.
텅충(騰越) 일본군의 마지막 옥쇄직전 탈출한 吉野孝公(Yoshino Takahiro) 의 수기『騰越玉砕記』(텅충옥쇄기) 와 역시 같은 장소에서 탈출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쿤밍에서 수용된 千田夏光(Senda kako)의『従軍慰安婦〈続編〉』(종군위안부 속편)를 보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승홍(昇汞, mercuric chloride)이라는 극약을 먹고 자결을 택한 반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기의 의지로 대부분 이 지역을 탈출하였다는 증언이 보인다.
둘째, 정진성과 강성현 등 한국학자들은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의 학살보고를 NARA에서 발견된 당시 동영상 및 시체사진의 증거로 연관시키고 있으나, 양자가 동일한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아무런 논증 과정이 생략된 무리한 추론일 뿐이다.
셋째. 정진성,강성현 등 한국학자들은 당시 텅충지역에 70~80명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미중연합군 보고서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에서 보고된 희생자 30명을 이들 중 일부라고 단언하고 있으나, 여러 증언자료 및 G-3 9월 9일자의 보고에 따르면, 텅충지역에는 30명 안팎의 위안부들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텅충은 연대단위임을 감안할 때 애초에 70~80명의 대규모 위안부를 수용할만한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고, 버마지역에서 이런 대규모의 위안부를 고용한 위안소 시설은 없었다.
浅野豊美(Asano Toyomi)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중화민국 제198사단 제592단 단장 도달강(陶達綱)의 저서를 인용, 텅충 전투가 종료된 후 중국군에게 체포된 위안부는 모두 18명으로 대만인 3명, 조선인 2명,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을 제시하였다.
한편 쿤밍포로수용소의 미군 심문기록에 따르면, 한국인 포로 25명중 여성 23명은 이중 13명이 텅충지역에 주둔한 56사단 113연대 소속 위안부라는 것을 밝혔다. 텅충지역의 위안부 총수가 30명인데,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의 학살보고를 신뢰한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9월 13일 모두 전멸했어야 맞다. 그렇다면 종전후 생존한 위안부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정진성, 강성현등 한국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거도 없이 텅충지역의 위안부 총수를 70~80명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견된 이 동영상에 등장하는 사체들이 위안부 사체들인지, 조선인 사체인지 확언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浅野豊美(Asano Toyomi)의 논문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 (운남과 버마 최전선 종군위안부) 에 따르면, 이 사체들은 9월 13일 일본군이 옥쇄했던 마지막 전투지가 아닌, 성 밖의 내봉산 기슭에서 발견된 사체들이다. 내봉산 지역의 방어전투는 한 달 반 정도 전에 있었던 일이며, 당시 후퇴할 때 수습하지 못하고 유기한 사체들이며, 사망한 지 오래되어 이미 부패가 심하게 진척된 상태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사체는 내봉산 지역에서 후퇴할 당시에 폭사하거나 자결한 사체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 사체들이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의 희생된 위안부들의 물증으로 본다는 것은 무리한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근거가 불확실한 위안부 ‘집단 학살론’은 국민들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유발케 하며, 따라서 반일감정을 선전 선동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잘못된 정치적 연구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2020.9.23.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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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ccording to the G3 Operation Diary (Reported by the US-China Allied Forces) on September 14, the suspected killing of 30 Korean comfort women ,is the unverified assumption reported by the media in the form of an entry.
If you read 騰越玉砕記 <The memoirs of a death for honor in Tengchong> written by 吉野孝公 (Yoshino Takahiro), who escaped just before the last honorable death of the Japanese army in Tengchong, as well as
従軍慰安婦〈続編〉
<The military comfort women (sequel)> by 千田夏
2. Korean scholars, such as Jeong Jin-seong, Kang Sung-hyeon, have linked the massacre report contained in the G-3 September 14th operation log, along with the video and body photographs discovered in the NARA ( Natinal Archives and RecordsAdministration ).
However, the question as to whether or not these can be regarded as the same victims has been omitted, and instead presented as fact. It's just illogical reasoning.
3. Korean scholars, such as Jeong Jin-seong and Kang Sung-hyeon, affirm that at the time, there were 70 to 80 comfort women who existed in the Tengchung area ,30 of whom were reported in the G-3 September 14th operation log. However, according to various testimonies and the G-3 report on September 9th , it is clear that there were only around 30 comfort women in the Tengchong area.
Considering that Tengchong was a regimental unit, there were no buildings capable of large scale accommodation of 70 to 80 comfort women in the first place. Also no comfort station facilities employed such large-scale comfort women in Burma.
In his thesis, 浅野豊美 (Prof. Asano Toyomi) cited the book by 陶達綱 , the head of the 592nd Regiment of the 198th Division of the Republic of China.
There were a total of 18 comfort women arrested by the Chinese army after the Tengchong battle ended, including three Taiwanese, two Koreans, and the rest were all Japanese. These are the photos that were presented.
Meanwhile, according to the investigation records at the Kunming Prisoner Camp by the US military, 23 of the 25 Korean war prisoners revealed that 13 of them were comfort women of the 113th Regiment of the 56th Division, stationed in the Tengchong area. The total number of comfort women in the Tengchong area was 30. If you trust the report of the massacre in the G-3 of September 14th, it is true that all Korean comfort women should have been exterminated on September 13th. So, how would you explain the 23 comfort women who survived the war ? In order to resolve this contradiction, Korean scholars, such as Jeong Jin-sung and Kang Sung-hyeon, assumed the total number of comfort women in theTengchong area to be 70 to 80, without any actual proof.
4. There is no basis to affirm whether the corpses in this video found in NARA are those belonging to comfort women or Koreans. According to the thesis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an on the Front lines of Yunnah and Burma>by 浅野豊美 (Asano Toyomi) , the corpses were not from the last battleground, where the Japanese troops shut down on September 13th after the honorable death(committed suicide) , but were found outside the castle at the foot of Naebongsan Mountain.
The defensive battle in the Naebongsan area took place about a month and a half prior, and they were abandoned corpses which could not be properly taken care of while retreating at the time.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view these corpses as corpses that were killed or committed suicide while retreating from the Naebongsan area. It is an unreasonable conclusion that the Naebongsan corpses are the only basis for the victims of the G-3 September 14th operation 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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