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사진 소개] 일제하 공창제 상업매춘과 이른바 평화의 소녀상 (위안부상) > 회원가입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대문사진 소개] 일제하 공창제 상업매춘과 이른바 평화의 소녀상 (위안부상) > 회원가입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img

회원가입

한일갈등타파연대

[대문사진 소개] 일제하 공창제 상업매춘과 이른바 평화의 소녀상 (위안부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1-02-01 16:57

본문

일제하 공창제 상업매춘과 이른바 평화의 소녀상 (위안부상)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둔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19452차 세계대전 종전 시기까지이다.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지배하던 1916년에 대좌부창기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을 공포하여 한반도에 공창제를 시행하였다. 성 판매 허가증을 받은 창기(娼妓)만을 공창(公娼)’이라고 하였으며, 작부(酌婦)나 예기(藝妓)의 성 판매를 묵인하고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창기뿐만 아니라 작부와 예기도 공창으로 이해되었다.

 

[사진]

왼쪽은 일제 방패사단에서의 위안부 생활을 기록한 자서전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문옥주과 구 우정성(郵政省) 구마모토 저금사무센터 보관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부(原簿). 문씨 증언에 의하면 26,145엔을 저금해 그 중 5,000엔을 친가에 송금했다고 한다.

 

오른쪽은 이른바 평화의 소녀상으로 불리는 위안부 동상. 1994년 정대협 설립자인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가 “13세에서 많으면 17세까지 10-20만 명의 (조선)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한 발언과 요시다 세이지의 강제연행설에 힘입은 이미지이다

일본군이 의무적으로 사용케 한 삿쿠(콘돔) 수를 기준으로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실제 조선인 위안부 수는 3,500명 수준으로 파악되며 평균 연령은 20대 중반이었고,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은 허위로 판명됐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한일갈등타파연대

대표이메일 : [email protected]
Copyright © 한일갈등타파연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