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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매매의 역사 1 / 오가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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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5-09-28 03:03

본문

성매매의 역사 (일본)

 

by 오가 타로 (おが太郎)

 

1. 일본 역사 속 금기

 

위안부 문제가 크게 다루어지지만, 왜 일본에서 애초에 위안부가 행해지게 된 흐름이라든가, 일본의 성매매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근대를 중심으로 전체적인 큰 틀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 에도 시대의 성매매 개요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종류

 

유녀

 주로 에도 시대에 성 서비스를 하던 여성. 유곽 등 막부가 공인한 장소에 있던 여성. 노래나 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음식 파는 여자(飯盛女 또는 飯売女)

일본의 숙소에서 일하며 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 또는 여관 점원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막부의 묵인 아래 운영되었다. 숙소 한 곳에 약 2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숨은 매춘부(隠売女)

에도 시대에 비공인 성 서비스를 제공한 여성.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장소에서 은밀하게 매춘을 행했다. 발각되면 처벌을 받았다.

 

에도 시대 초기에 막부 공인으로 유명한 3대 유곽이 생겨난다.

에도의 요시와라, 오사카의 신마치, 교토의 시마바라

 

유녀들은 생계 곤란이나 빚 등으로 몸을 팔게 되었기에 자유 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장소에서 도망칠 수 없게 하고,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창살 앞에 줄지어 세워져 오로지 손님 상대만 계속해야 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었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의 내항을 계기로 쇄국이 풀리고, 유럽과 미국 등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노예무역의 역사도 펼쳐지게 된다.]

 

서양에서는 노예제 폐지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성매매로 인해 성병이 만연하자 성병 예방 대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일본 유녀에게 강제적으로 성병 검사를 실시한 데서 시작된다.

 

막부 말기에 나가사키에 온 러시아 함대의 수병이 마루야마 유곽을 이용하다가 매독에 걸려버린다.

1860년 러시아가 나가사키 이나사에 매독 검사소 설립을 요구하여 설립됨.

마루야마 유곽의 유녀 절반 이상이 매독 감염.

 

서구의 압력 아래 일본 각지에 매독 검사소가 설립됨.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 국제사회에서 서구와 대등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막번 체제 시절의 신분제를 폐지하고, 성매매에 대해서도 국가가 주도하여 관리·통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872년 예창기 해방령

주로 창기, 예기에서 행해지던 인신매매를 금지.

 

인신매매 시 발생하는 몸값은 부당하며, 이에 따른 소송에도 응하지 않는다.

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이 스스로 대여좌석을 빌려 영업하도록 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을 창기라 한다. 정부 공인이며, 유녀와는 다른 명목이 된다.

 

인신매매는 금지했으나 성매매 자체는 금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인신매매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었다.

대좌식 업자에 의해 창기가 특정 대좌식에 구속되어 자유가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1876년 성매매 단속에 관한 정부 발표 실시.

성매매 단속 권한이 경찰로 이관되었다.

대좌식, 창기의 영업 신청은 경시청에 제출하게 된다.

 

1회 검매(검역) 받기

대좌식 업자와 창기 모두 수익의 일정 비율을 정부에 납부

 

결국 유곽 구역 밖으로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구속은 변하지 않았다.

 

 

3. 성매매의 번성

 

홋카이도에서는 1871년 스스키노 유곽이 설치됨.

그때까지 홋카이도는 아이누 문화가 번성하고 미개척지가 많았음.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많은 남성이 이주했고, 그들의 오락장으로서 번성하게 됨.

 

1873년까지 일본 각지에 진대*가 설치됨.

(진대는 일본 각지에 배치된 군대)

중앙집권 국가가 된 일본은 군비를 증강해 나갔다.

진대 주변에도 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가 늘어났다.

 

[조선에서도 일본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점차 성매매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때까지 조선 왕조는 겉으로는 성매매를 금지했으나, 뒤에서는 기생이라 불리는 사람들 등 성매매가 존재했다.

일본 거류지에서 대여 좌석을 만들어 성매매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은 주로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1896년 런던 데일리 뉴스 기자의 질문에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들(창기)을 단순히 부도덕(不徳)하다고 비난하지 말라.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 중에는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부모를 돕기 위해, 몸을 팔아 효도를 다하려는 고상한 목적을 가진 자도 있다. 그러므로 고행 중에 선행을 쌓는 자는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1900년 훈령 제17

창기는 18세 이상이어야 하며 경찰에 명부 등록이 필요함.

외출 시 경찰의 허가가 필요함.

창기 명부 삭제는 본인이 경찰에 구두 또는 서면 제출로 가능.

자유 의지로 본인이 원하면 그만둘 수 있음.

다만, 대여업자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례나

빚을 진 경우에는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재판례가 있음.

 

이 훈령의 영향으로 창녀를 그만두는 사람들도 늘어나 일본 국내 창녀 수는

1899년 약 52천 명

1902년 약 38천 명으로 감소 추세에 있었으나, 청일전쟁 후 불경기 영향으로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선다.

190442천 명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해 나가면서 군대를 증강했고, 그에 따라 유곽을 설치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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