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연합군'위안부'] 일본 ‘특수위안시설협회’(R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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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5-09-11 17:21본문
일본 ‘특수위안시설협회’(RAA)
RAA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 일본 정부와 도쿄도의 지원 아래, 연합군 병사 전용 성매매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1945년 8월 23일 도쿄 접객업자 단체들이 설립한 협회이다. 명칭은 영어로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이라 했으나 실제 목적은 연합군 점령기에 일본 여성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위안소를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1. 설립 배경
실제로 점령 직후 가나가와현 등지에서 강간 사건이 빈발했으며, 경찰 보고에 따르면 상륙 1개월 만에 3500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이에 내무성과 경시청은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는 방파제”라는 명분으로 위안소 설치를 기획하였다.
8월 18일 내무성은 ‘외국군 주둔지 위안시설 설치’ 지침을 비밀 통달했고, 23일에는 도쿄의 접객업 단체 7개가 모여 협회를 발족했다. 이후 대장성 보증과 일본권업은행 융자를 통해 거액의 자금이 조달되었고, 콘돔과 자재 등이 국가 차원에서 제공되었다.
2. 운영 실태
전성기에는 약 7만 명, 폐쇄 직전에도 5만 5천 명의 여성이 종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쿄 오모리 해안의 요정 ‘코마치엔’이 제1호 위안소였으며, 이후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히로시마 등 전국 각지에 확산되었다.
시설은 장교용·병사용으로 구분되었고, 카바레·비어홀 형태의 오락 시설도 병행되었다.
여성들은 하루 30~60명을 상대해야 했으며, 성병·피로·정신적 손상으로 인한 피해가 다수 보고되었다. 어떤 이들은 자살에 이르렀다.
당시 매춘부 임금은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상당한 금액이었으나, 관리에는 전전 요시와라 출신 업자나 야쿠자가 개입해 착취가 만연했다.
3. 모집 방식
초기에는 기녀·유흥업 종사자 중심으로 모집했으나 인원이 부족해 신문 광고까지 동원되었다.
“국제 친선”, “국민 외교”, “특별 여자 외교 담당” 등의 표현으로 광고하며, 의식주 보장과 고액 수입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빈곤, 전쟁 미망인, 공습 피해 여성, 심지어 처녀까지 다수 포함되었고, 속거나 강제된 사례도 많았다.
하루 평균 300명 이상이 지원할 정도로 전후 궁핍이 여성들을 몰아넣었다.
4. 점령군의 태도와 변화
GHQ는 성병 확산을 우려해 도쿄도에 여성들의 강제 검진을 명령했고, 이는 전후 도정 제1호 규칙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 내부, 특히 군목과 미국 사회에서 매춘 조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뉴스위크』 등 미국 언론이 RAA 실태를 폭로하자, 미 의회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결국 1946년부터 미군은 매춘 금지 방침을 강화했고, RAA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5. 역사적 의미
RAA는 일본 정부와 경찰, 업계, 심지어 우익 단체까지 결합해 국가적 차원에서 운영한 전후 공창 체제였다. 명분은 “일본 여성 보호”였지만 실제로는 수만 명의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점령군 성욕을 통제하려 한 구조적 폭력이었다. 여성들의 참여는 자발과 강제가 뒤섞였으며, 극심한 빈곤과 전후 혼란이 배경이었다.
RAA의 존재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패전 직후 자국 여성들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가진다. 또한 GHQ의 위생·통제 정책과 충돌하면서, 점령기 일본의 성과 권력, 국가와 여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출처: 링크
*전문: 번역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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