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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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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1-03-30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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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일, 일본의 유력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은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위안소를 설치했으며 베트남인 위안부를 모집하여 한국군 사병을 상대로 매매춘을 시키고 있었다는 내용을 게제했다. 이 내용은 일본 방송사인 TBS 워싱턴 지국장인 야마자키 노리유키(山口敬之) 씨의 취재 결과 밝혀진 것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로 시종일관 일본을 비난하고 있는 한국이 실은 베트남에 위안소를 설치하며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다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이중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간문춘]의 기사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여기에 올려 놓는다. 


<한국군이 사이공에 설치한 위안소는 건물이 아직 남아 있으며 현지인들은 당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미 공문서관에서 발견된 ‘서한’으로 처음으로 한국군 위안소의 존재가 밝혀졌다. 그 실태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서한’에 적힌 ‘터키탕’ 등 관련 시설의 흔적을 찾고 더욱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본지(주간 문춘) 취재진은 베트남을 찾았다.
 

 먼저 찾아간 곳은 미군 사령부로부터 한국군 사령부에 발송된 ‘서한’으로 지적된 ‘터키탕’이다. 문제의 건물은 호치민 시내에 지금도 남아 있으며 거기에서 벌어진 일은 인근 주민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 건물 주변에 오랫동안 살아왔고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남베트남군 헌병으로 당시 사이공 시내의 치안 유지를 담당한 빈 씨(67)는 자택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터키탕’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터키탕은 1968년 쯤으로부터 1975년의 사이공 함락까지 영업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에 의해 게릴라 공격으로부터 사이공 시내의 주요 정부 시설이나 교량 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있었던 나는 미국과 한국의 군 관계자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택 근처에 있었던 위안 시설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빈 씨에 따르면 북부 전선에서 싸운 한국군 병사는 사이공에서 지내는 ‘휴식 기간’ 동안에는 시내 각지에 있었던 숙박 시설에서 몇 주간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터키탕으로부터 약 100미터 떨어진 장소에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 운영하는 MP(헌병대) 시설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탐낸 그들은 저녁이 되면 짚차나 트럭으로 시설 앞에 세워 소란을 피우면서 앞다투어 터키탕에 몰려욌습니다. 술에 취한 군인들이 배회하니까 많은 주민들은 불쾌감을 느꼈으나, 군이 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이 ‘터키탕’ 운영에 한국군에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다. 근처에 사는 또다른 주민이 증언한다.

 

 “터키탕이 있었던 건물은 원래 베트남 여성들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사귀고 있었던 군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 남자가 자금을 제공하며 터키탕을 개업한 것입니다. 휴식중인 한국군을 상대로 하니까 손님이 끊임없이 와서 업소에는 항상 10 – 15명 정도의 베트남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농촌 출신 여성들이었는데 날마다 많은 한국군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보기도 싫다’고 말했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 전용 위안소는 사이공 시내뿐만 아니라 한국군이 주둔하는 많은 도시에 개설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65년에 상륙한 미 해병대가 대규모 미군 기지를 건설하며, 한국군의 정예 부대인 해병대 제2여단 ‘청룡부대’가 주둔한 베트남 중부의 도시 다낭에는 많은 한국군 관련 시설이 지어졌으며 밤이 되면 유흥가에는 미군 병사와 함께 한국군 병사도 넘치고 있었다.

 

 남베트남 공군의 전직 조종사로 미군과 함께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작전에도 참가한 다낭 출신의 권 씨(74)가 말한다. 

 한국군은 다낭 시를 북베트남군의 침공으로부터 지키는 목적으로 다낭 시 부근에도 포진하고 있었으며 시내에는 한국인 전용 휴양소가 몇 군데나 있었습니다. 사이공 등 남부의 도시에서는 동맹군인 한국군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으나 농촌 시대에서 벌어진 학살이나 강간 등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도 한국군에 대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들은 미군이 하지 않은 “더러운 일”을 할 역할을 맡아서 베트남에 왔는데, 그들도 스스로 그러한 입지를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매사에 한국군 군인은 “미군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제 자신도 한국군 군인과 교류도 있었으나, 1968년에 다낭 부근의 하미 마을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 사건에서 한국군에 의해 친구가 학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들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서한에는 다낭 시내에도 ‘한국군 시설’이 있었다고 지적되어 있었다. 1973년의 한국군의 철수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시가지 재정비 작업 등으로 당시의 건물은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는데, 69년에 일명 ‘한국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바이 씨(77)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친척으로부터 사이공에서 이사해 온 이 씨라는 한국 사람이 요리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면접을 갔습니다. 요리 솜씨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씨 마음에 들었던 나는 1,000돈이라는 파격적인 월급을 받는 조건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 업소에는 식당과 바가 같이 입주하고 있었으며 한국인 전용 업소였습니다. 이 씨 부인에게 김치를 담그는 방법이나 대두를 갈아서 발효시킨 청국장을 끓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돼지 고기를 삶아서 먹는데 한국군 군인을 위해 구운 돼지 고기를 제공했습니다. 밤이 되면 베트남 여자가 업소에 나타나서 군인들과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춘 다음 윗 층에 있는 방에 올라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습니다. 업소에 오는 한국군 하사관이 사복 차림의 이모 씨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한국군 군인으로부터 “저 사람(이모 씨)은 한국군의 높은 분이다”라는 말을 듣고  업소가 한국 군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는데 그 화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모 씨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나에게 잘해 주었으나 한국군이 철수한 후에 한국군이 농촌에서 벌인 양민 학살을 알고나서 “저 사람들이 그런 짓을 했다니......”라고 공포감을 느낀 것이 생각납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 기사를 요약하면 한국군은 베트남 각지에 한국군 전용 위안소를 설치했으며 현지 베트남 여성들을 고용해 매매춘 행위를 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위안소를 이용하는 한국군 하사관이 위안소 업주에게 정중히 경례를 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군은 위안소를 직접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에게 업소를 맡겨 운용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 출처: ISHIGAMI 다음블로그
한국인이 알아서는 안 될 불편한 진실 -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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