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병참] 위안부 성노예설은 과장된 것 > 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무한병참] 위안부 성노예설은 과장된 것 > 자료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img

자료실

한일갈등타파연대

[무한병참] 위안부 성노예설은 과장된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1-03-30 03:41

본문

[불편한 진실] "#위안부 성노예설은 과장된 것" 무한병참

일본군 위안소의 내실을 적나라하게 적은 [#무한병참(武漢兵站)]이라는 책이 있다. 중국 내륙의 호북성(후베이성) 한구(漢口, 현재의 무한[武漢, 우한]의 일부) 적경리(積慶里)에 있었던 일본군 무한 병참(후방 기지)이 설치된 위안소를 관리한 일본군 장교의 수기이다.

저자는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淸吉) 씨이며 1900년에 태어나 한구에서는 1943년에 일본 육군의 대위로 한구 병참의 ‘위안 계장’으로 임명돼 위안소를 관리했다. 야마다 씨가 이 책을 펴낸 것은 1978년이며 종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현안으로 대두되지도 않았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에게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날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믿을 만하다. 이 책을 읽으면 소위 위안소나 종군위안부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성노예’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위안부에 관한 자료라면 대서특필하는 한국 언론도 이 책에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야마다 씨의 책의 내용을 발췌 인용해 본다.
*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함께 일했다. 그리고 일본인 업주(포주)와 조선인(포주)도 같이 영업을 했다."

한구(漢口)의 특수 위안소는 강한로와 중산로가 교차하는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난민구 안의 적경리(積慶里)의 일각에 있었다. 중산로의 큰 길의 옆골목을 들어간 곳이며 이 구역은 높은 벽돌담으로 외부와 차단되고 있었다. 후방 병참의 위안소인 만큼 전선이나 전선 근처의 위안소와는 취향이 다르다. 한구에서 ‘적경리’라고 하면 위안소를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입구에서 들어가면 우측에 한구 경비대의 순찰 초소, 업자들의 조합 사무실(2층은 진료소, 병실)이 있었고, 좌측에는 창고, 취사장, 일꾼들의 숙소가 있었다. 그 안쪽 길 양측에 상호를 가진 업소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에는 군의 지시에 따라 일본 내지인 마쓰시마, 후쿠하라의 업소가 여기에 지점을 내는 형식으로 진출한 업소도 있었다.

그 대부분은 본점의 상호를 따라 지점의 상호를 정했다. 가령 오사카 청남루(오사카), 동성루(고베), 하네다 별장(히로시마) 등 이외에 기요후지 루, 전첩관, 마쓰모토 루, 가쓰키 루, 마쓰우라 루 등 9개 업소가 있었다. 그밖에 조선인들이 경영하는 미요시 루, 청산관, 삼성루, 태평관, 평화관, 하나노야, 무한루 등 11개 업소가 있었다.

여기에는 내지인(일본인) 위안부 130명, 조선인 위안부150명, 도합 280명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적경리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를 차별하는 풍조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업소 건물을 지나 가장 안쪽에는 공원이 조성되고 그 한 구석에는 한구에 와서 병으로 숨진 위안부들의 공양탑이나 신사 건물이 있었다.

공원 중앙의 광장에서는 잔디가 심어져 아침에는 위안부들이 라디오 체조를 하거나 한 달에 한 번 있는 휴일 밤에는 병참 영화반이 위안부들을 위해 영화를 상영하기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전선에 있는 살벌한 위안소와는 전혀 양상을 달리했었다.

"위안소는 경영자는 조선인을 포함한 민간 업자, 일본군은 그 민간 업자의 불법 행위를 단속했다."

병참에 오래 전부터 있는 나가사와 군의관의 이야기에 따르면 1938년 10월 중지 파견군이 무한 지구를 공략했을 때 초대 한구 병참 사령관은 이케다 류 대령이었다. (중략) 당시 군에 따라 한구에 들어온 업자들은 헌병대와 유착하여 중산로에 가까운 시내 빈집을 점거해 거기에서 불법적으로 영업하고 있었다. 방첩면이나 방역면으로 보아서 이러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전력 유지를 위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그 당시 조선인 위안부는 노예와 다름없는 상태로 혹사되고 있었으나 내지인(일본인) 위안부와 같은 전차금(가불금) 제도를 적용하도록 했다. (중략) 업자에도 여러 유형이 있어서 분쟁 지역에 건너가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위안소 장사를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 배낭 하나를 메고 중국 대륙에 와서 큰돈을 벌려고 했던 장사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군의 명령에 따라 부득이 지점을 낸 마쓰시마, 후쿠하라 등지의 업자들도 있었다.

이들 두 업자들의 사이는 지극히 안 좋았고 내지인(일본인)끼리 서로 경쟁하는 양상을 보였다. 적경리가 표면적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내지인(일본인)인 사이토가 조합장, 조선인인 가네다가 부조합장을 맡아 조합을 결성하여 조합을 통해 위안소를 병참이 단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이토는 시골의 이장을 방불케 하는 소박하고 마음씨 좋은 노인이며, 가네다는 원래 김정현이라는 조선인들이 1939년의 창씨개명으로 ‘가네다’로 개명한 자이며 키도 크고 재치도 있고 성격도 좋으며 전면적으로 군에 협조하려는 사람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조선인’이라는 말은 조선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반도인’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일본군 병참이 업자들을 감독하고 업자들의 착취나 부정행위를 단속했다."

"위안부들은 한 달에 4, 5백 엔이라는 돈을 벌 수 있었으며 1년 반 정도로 위안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위안부들이 벌어들인 돈은 각 업소마다 하사관과 병사들로 구분되어 개인별로 접객수와 금액이 날마다 병참에 보고된다. 각 부대에서는 일요일에 외출이 집중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중략) 위안소 이용 시간은 병사의 경우 10시부터 17시, 하사관은 20시까지, 장교는 20시 이후로 규정되어 있었다.

요금은 원래 장병의 봉급과 위안부의 능력, 전차금(가불금)의 변제, 업자의 운용 경비를 감안해서 적절한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장교가 숙박할 경우 40엔, 하사관이 낮에 이용할 경우에는 15엔, 병사들은 10엔이었다고 들었다. 제가 부임한 1943년 4월 경에는 장교는 100엔, 하사관은 50엔, 병사는 30엔으로 개정된 것으로 기억한다. (중략)

그런데 위안부 중에는 계산을 잘 못한 자도 있었다. 아무리 일을 해도 빚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기존의 전차금(가불금)을 받는 대신 모든 자유를 뺏기는 봉건적인 고용 형태 때문에 업주들에게 따져 볼 수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참고 포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군은 이와 같이 약한 입장에 놓여 있는 위안부들을 대신하여 그러한 부조리를 밝히고 만약 비리가 있으면 즉시 시정을 명령한다고 단언했다. 위안부들은 내심 안도했던 표정으로 듣고 있었으나 업주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계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담당 하사관과 함께 병참에 제출된 일계표를 바탕으로 각 업소의 실태 조사에 나섰다. 이 일계표의 기본이 되는 것은 각 업소에 있는 화대 장부인데 일계표와 화대 장부를 대조했더니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 원인은 규정 이상으로 받은 팁을 처리하기 위해 이용자수를 호위로 늘려서 보고했던 것이 원인이었으나 계산을 잘못한 부분도 있었다.

나의 감사를 받고 당황한 업주들은 장부나 보고를 재검토하고 과거에 소급해서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차금(가불금)의 원부인 개인별의 화대 장부 등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대여금이 있었고 심지어는 병참에서 배급한 시트나 잠옷까지도 시가로 적어놓은 사례도 있었다. 그러한 잘못을 힐문했더니 전혀 변명하지 못하는 업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화대 장부는 모두 병참의 검인을 찍도록 했다. 식비 및 영업 경비는 모두 업주들의 부담으로 하고 화대의 분배 비율은 전차금이 있는 자는 업주 60% 위안부 40%, 전차금이 없는 자는 업주와 위안부가 절반씩 가져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업주들은 나의 방침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으나 장부 기록의 부실함과 경리상의 비리를 구체적으로 지적당하며 그리고 따르지 않는 업주들의 영업을 중단시키기로 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병참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또한 병참은 피임구를 배급하기 위해 정확한 이용자수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이용자수를 정확히 보고하도록 했다. 위안부들이 부득이 받은 팁에 대해서는 잉여금으로 보고하도록 하며 이것을 적립하여 위안부들의 복지 후생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다만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에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눈을 감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안부들의 수입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병사 6명, 하사관 1명, 장교 1명을 상대로 하며 한 달(공휴일 등을 제외) 28, 29일 동안 일한다면 일본 돈으로 4, 5백 엔 정도였다.(현재 금액으로 환산하여 대략 60만 엔 정도 ) 전차금은 평균 6, 7천 엔 정도였기 때문에 대략 1년 반 정도로 전차금을 변제할 수 있고 조금 더 일하면 약간의 예금도 할 수 있도록 지도를 했었다.

자세한 수입에 관해서는 짧은 시간만 위안소를 이용하는 장교 등도 있었던 관계로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실질적인 수입은 이보다 많았을지도 모른다. 24시간 그녀들을 감시하지 못한 관계로 자세한 실태까지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들의(위안부들의) 하루 일과는 (접객 시간은 별도로 해서) 아침 식사는 8시 반, 점심은 13시, 저녁은 18시에 먹고 야식으로는 우동이나 라면 등을 먹었던 것 같다. 때로는 장교들이 위안부들과 불고기 등을 먹을 경우도 있었다(물론 규정 위반이었지만 묵인돼 있었다). 내지인(일본인) 위안부 중에는 병참으로부터 배급 받는 쌀은 맛이 없다고 해서 배급 받은 쌀을 중국인 일꾼들에게 팔아서 스스로는 암시장에서 쌀을 사서 먹는 자도 있었다. 

위안부의 식사는 위안소의 공동 취사장에서 조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반찬류 등은 업소마다 적당히 조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위안부는 육체 노동이므로 어느 정도의 영양 보충은 필요하며 영양가가 없는 음식으로는 체력 유지가 안 되며, 그래서 불필요한 지출이나 낭비를 하지 않도록 병참에서도 음식의 영양가에 고려를 했었다


다만 위안소 내부에서 음식을 먹는 행위에 대해서는 야간에 숙박하는 장교에 한해 묵인했으나 낮에 이용하는 하사관, 병사의 경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병사 중에는 물통에 술을 넣고 와서 위안부와고 같이 마시는 경우가 있었으나 술에 취하면 피임구를 쓰지 않았거나 위안부가 세척 등의 사후 처리를 게을리 하기 일쑤였다. 

 

 위안소에는 진료소가 있어서 병참에서 담당 군의관이 와서 날마다 근무했다. 이른바 성병 검사도 대략 1주일에 한 번 실시되었다. 담당 군의관의 말로는 성병에 걸려서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키는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즉시 휴양이 명령되었다. 그러나 성병으로 인해 입원할 경우에는 수입이 대폭으로 줄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이것을 감추려고 해서 검진을 받는 날에 미리 고참 위안부가 성기를 점검해서 색이 변한 부분에 입술연지를 발라서 감추거나 짓무른 부분을 과산화수소수로 세척하거나 해서 사전 은폐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시로 위안부를 추출해서 호출해 임시 검진을 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위안소에서 일하러 지원한 여자도 있었다"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한 태평관(太平館)의 조선인 업주가 아직 17, 8살밖에 안 보이는 조선 여자애를 데리고 병참에 왔다. 호적등본을 보니 아직 16살이었다. 18살 이하인 자에게는 영업 허가를 내 줄 수 없다. 업주는 가난한 시골의 관습으로 출생 신고가 늦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18살이라고 한다. “절대로 안 된다. 나이가 부족한 여자를 어떻게 위안소에서 일하게 할 수 있겠냐고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한 달이 지나서 그 여자애가 혼자 병참에 와서 꼭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너는 위안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냐?”

알고 있다

군인들은 난폭하니까 아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너가 나중에 힘들어서 울어도 나는 어떻게 해 줄 수 없다

절대로 울지 않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겠다

그러면 군의관에게 가서 증명서를 받아 와라

 

혹 실제로 출생 신고가 늦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서 결국 업주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군의관의 신체 검사를 받도록 한 뒤에 허가를 내주기로 했다. 이 위안부에게는 미치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질이 있었는지 2, 3달 뒤에 요염한 몸짓이 어울리는 성숙된 모습이 되었다.

 

< 한국에서는 위안부들이 일본군이나 헌병대, 경찰에 끌려 오거나 속아서 위안소에 들어온 온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제 발로 위안소에 들어온 위안부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악덕 업주들에게 속아서 들어오거나 업자에게 팔아 넘겨진 피참한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위안소에서 일하는 것을 자원한 사례도 있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


◎ 출처: ISHIGAMI 다음블로그
한국인이 알아서는 안 될 불편한 진실 - 종군위안부 성노예설은 과장된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한일갈등타파연대

대표이메일 : [email protected]
Copyright © 한일갈등타파연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