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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구 미군위안부 김모씨(77)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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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일갈등타파연대 작성일 24-12-07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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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이제 떳떳하게 살 거야”

‘국가폭력’ 손배소 8년3개월 만에 대법원 승소 판결 받아낸 ‘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숙자 할머니

김씨가 기지촌에 발을 들인 것은 18살 때였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딸이라는 이유로 구박받다가 12살 때 집을 나왔다. “기차를 타고 전남 장성에 갔더니 어떤 아줌마가 군인 가족을 소개해줬어. 그 가족을 따라 서울 용산으로 가서 식모살이를 시작했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18살 때까지 식모살이했어. 하지만 돈 한 푼 못 받았지.”

식모살이를 그만둔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친구들을 따라 경기도 송탄 기지촌으로 갔다. “또래 애들 서넛이 송탄 기지촌에 갔는데 난 적응하지 못했어. 포주집에서 청소하는 일만 했지. 그런데 나를 눈여겨본 언니가 있었어. 돈을 잘 벌고 알아주는 언니였는데 미군과 결혼할 예정이었어. 그 언니가 엄마(포주)한테 나를 1년 동안만 데리고 있겠다고 했어. 그래서 그 언니 집에서 청소하며 살았어. 월급은 못 받았어. 1년이 지난 뒤 언니는 미국으로 가게 됐는데, 나를 불러 1년치 월급을 주더라. ‘얘, 너 포주집에 들어가지 마라. 이 돈 갖고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했어.”

김씨에게 그 언니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19살 김씨는 기지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어린 소녀가 돈을 벌 방법은 또래가 있는 기지촌 생활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 집에서 미군이랑 같이 살다보니 영어도 할 줄 알았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에게 잘해준다고도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들어간 기지촌은 충남 천안시 성환읍에 있었다. 이후 충북 진천, 충남 태안, 경기도 평택까지 기지촌을 전전했다.

김씨와 친구들은 매주 두 차례 보건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받고 탈락하면 낙검자 수용소에 들어갔다. “탈락하면 ‘몽키하우스’(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에 갇혀 있어야 해. 꽃 이름이 붙은 방에서 치료받는데 며칠씩 있어야 했어. 진천 기지촌에 있을 때 친구가 검사에서 떨어졌어. 그래서 페니실린을 맞았는데 30분 만에 쇼크로 죽었어. 걔는 누워 있고 나는 기다리는데 그사이에 죽은 거야. 20대 초반 귀한 딸이 그런 식으로 죽었으면 나라에서 가만히 있었겠어?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우리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어.”

기지촌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쿠바 출신 미군 ‘철수’였다. 쿠바식 이름이 길고 어려워 김씨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내 성인 김씨를 따라 김철수라고 지었어. 그가 20살, 내가 27살이었지. 2년 동안 같이 살았는데 철수가 미국으로 발령 나서 2년을 (한국에서) 기다렸지. 다시 한국에 와서 또 2년을 같이 살았어. 철수가 미국에 갈 땐 결혼해서 같이 가고 싶었는데 잘 안 됐지. 그 사람이 떠난 뒤 미국에 편지를 몇 번 보냈는데 답이 없더라고. 그러다가 철수 어머니가 답장을 보냈어. 한국 여자랑 결혼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다신 자기 아들에게 편지하지 말라고. 그 뒤로 연락하지 못했어.”

가끔 철수가 생각날 땐 그가 즐겨 불렀던 <꽃반지 끼고>라는 노래를 부른다. “10월6일이 철수 생일인데 잘 살고 있나 가끔 생각나. 철수가 떠나면서 사준 이불이 있는데 아직도 덮고 있어. 세상에 50년 된 이불을 덮는 사람이 있을까. 철수가 사준 일제 선풍기도 몇 년 전까지 썼는데 고장 났어. 선풍기 버릴 땐 눈물이 나더라고.”

31살에 평택 기지촌으로 온 뒤 김씨는 평택에 정착했다. 줄곧 혼자 지냈다. 58살까지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그때 모아둔 돈으로 지금 생계를 꾸려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햇살사회복지회를 찾아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에겐 큰 힘이 된다. “노인정 가면 다들 자식 자랑, 손주 자랑 하는데 난 듣기만 하고 어울리지 못하거든. 이 세상에 나 혼자인데, 그래도 여기 오면 편안해.”

*전문 (대법 승소 판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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